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2024년에 색이 바뀐 그림
2024년 5월 2일, 이 그림은 여섯 달 만에 루브르의 벽으로 돌아왔습니다. 복원 과정에서 오랜 세월 쌓인 누런 바니시와 때를 걷어냈고, 그 결과 색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루브르 회화부장 세바스티앵 알라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의 색을 다시 발견한 첫 세대라고. 다시 말해, 여러분이 교과서나 인터넷에서 본 도판은 지금 벽에 걸린 그림과 다른 색입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1798~1863)
- 제작 시기: 1830년 9월~12월
- 원제: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260 × 325 cm
- 미술 사조: 낭만주의
- 소장처: 루브르 박물관, 파리 (1874년 이후)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이 크기의 캔버스는 원래 역사화의 것이었습니다. 아카데미의 장르 위계에 따르면 신화나 고대사에 배정된 규모입니다. 들라크루아는 그 화면에 몇 달 전 파리 거리에서 벌어진 일을 그렸습니다.
1830년 10월 21일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기분이 나빴는데 작업 덕분에 나아지고 있다고, 현대적인 주제를 시작했다고, 바리케이드라고.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리기는 하겠다고.
그는 실제로 바리케이드에 서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은 참전의 기록이 아니라 참전하지 못한 사람의 기록입니다.
화면 구성은 삼각형입니다. 바닥의 시신과 잔해가 밑변이고, 중앙의 자유가 몸통이며, 삼색기가 꼭짓점입니다. 혼돈처럼 보이는 화면에 이 구조가 질서를 잡아 줍니다. 그리고 그 삼색기는 이 혁명을 계기로 왕정의 흰 깃발을 밀어내고 프랑스의 국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파리 시민들은 샤를 10세의 언론 탄압과 의회 해산에 맞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 사흘을 ‘영광의 3일’이라 부릅니다. 왕은 물러나고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 앉았습니다.
흔히 이 그림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오해합니다. 다른 사건입니다. 원제에 ‘1830년 7월 28일’이라는 날짜가 들어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에게 이 시기는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1828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이 냉담한 반응을 받은 뒤 그의 경력은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혁명을 목격한 그는 9월부터 이 대작에 착수해 몇 달 만에 끝냈습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 자유.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 총검 꽂은 소총을, 왼손에 삼색기를 들었습니다. 프리기아 모자는 1789년 혁명 이래 자유의 표지였습니다. 그녀는 맨발이고, 옷은 찢어져 있으며, 겨드랑이에는 털이 있습니다. 여신이면서 동시에 거리의 여자입니다. 당대 비평가들이 특히 못마땅해한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 시신 더미. 그녀가 딛고 선 것은 대좌가 아니라 시신과 잔해입니다. 화면 왼쪽 아래 남자는 바지가 벗겨져 있습니다. 당시 시가전에서 시신에서 옷을 벗겨 가는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 소년. 양손에 권총을 든 소년이 자유의 오른쪽에서 달려 나옵니다. 이 인물은 훗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가브로슈의 원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 계층의 혼합. 왼쪽에는 셔츠 차림에 허리춤에 권총을 찬 노동자가 있고, 그 옆에는 실크해트에 재킷과 조끼를 갖춘 부르주아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계급이 같은 바리케이드에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주장입니다.
- 실크해트의 남자. 이 인물을 들라크루아의 자화상으로 보는 이야기가 오래 퍼졌지만,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9세기 말에는 극장 감독 에티엔 아라고라는 설이, 이후에는 훗날 루브르 큐레이터가 되는 프레데리크 비요라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 배경. 화약 연기 너머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탑이 보이고, 그 위에 삼색기가 걸려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화면 속 몇몇 인물은 삽화가 니콜라 샤를레의 판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들라크루아는 그가 파리 사람들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포착한다고 여겼습니다.
이 그림이 겪은 일들
1831년 살롱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프랑스 정부가 곧바로 사들였습니다. 뤽상부르 궁의 왕좌실에 걸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걸리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혁명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그림은 들라크루아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왕정이 사들인 뒤 되돌려준 것입니다. 이후 몇십 년 동안 간헐적으로만 공개되다가, 1874년에야 루브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려진 지 사십사 년 만이었습니다.
20세기에 이 이미지는 100프랑 지폐에 실렸습니다. 국가가 처음에는 감추려 했던 그림이 화폐가 된 것입니다.
2013년 2월에는 루브르랑스에 대여 전시 중이던 이 작품에 한 여성이 검은 마커로 글씨를 썼습니다. 며칠 만에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2024년, 여섯 달에 걸친 복원을 마치고 5월 2일 루브르에 돌아왔습니다.
2024년 이전에 인쇄된 도판은 모두 복원 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런 일은 이 그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최근 이십여 년 사이, 명화의 ‘원래 모습’이라 여겨지던 것이 실은 세월의 결과였음이 드러난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나머지는 여기에 정리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에 대하여
들라크루아(1798~1863)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신고전주의의 앵그르와 대비되는 위치에 놓이며, 선보다 색을, 정적인 완결성보다 격렬한 움직임을 택했습니다.
그는 폭넓게 읽고 들었습니다. 바이런과 셰익스피어를 좋아했고 쇼팽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1832년 모로코 여행은 그의 색채를 다시 한번 바꿔 놓았습니다.
그의 색채 처리와 붓 자국은 인상주의로 이어집니다. 같은 루브르에 있는 벨라스케스와 『모나 리자』를 모사하며 배운 사람이, 결과적으로 다음 세기의 문을 연 셈입니다.
유산과 영향
이 그림 속 자유는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 마리안의 형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관공서와 법원에 놓인 마리안 흉상의 계보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구도 자체도 계속 인용됩니다. 혁명과 저항을 다루는 포스터, 앨범 커버, 사진이 반복해서 이 삼각형과 깃발을 빌려 씁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과 함께 낭만주의가 무엇을 시도했는지 보여주는 한 쌍입니다. 두 그림 모두 동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역사화의 크기로, 이상화하지 않고 그렸습니다. 같은 시기 스페인에서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도 같은 계보에 놓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에 있습니다. 대형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들이 모인 구역이며,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이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 휴관일은 화요일입니다.
- 온라인 사전 예매를 강력히 권합니다. 개관 직후가 가장 한산합니다.
- 전시실 배치는 조정되므로 방문 전에 공식 웹사이트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2026년 1월부터 비유럽연합 국가 방문객의 입장료가 인상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신다면 여기에 해당합니다.
- 같은 드농관에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있습니다.
같은 미술관의 『모나 리자』 앞은 늘 붐비지만, 이 그림 앞은 그만큼은 아닙니다. 크기는 훨씬 큰데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2024년 세척 이후로는, 이 그림을 실물로 볼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널리 퍼진 도판 가운데 지금 벽에 걸린 것과 같은 색을 보여 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방향입니다. 자유는 화면 안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관람자 쪽으로 걸어 나옵니다. 시신 더미를 딛고 캔버스 밖으로 나오는 구도입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을 바리케이드 앞에 세워 놓았습니다.
이미지: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