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 – 구름 속에 뭉크가 직접 쓴 한 문장
이 그림의 왼쪽 위 구석, 붉은 구름 속에 연필로 쓴 문장이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다.” 1904년 코펜하겐 전시에서 한 덴마크 비평가가 발견한 뒤, 백 년 넘게 성난 관람객이 저지른 낙서로 여겨졌습니다. 2021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 적외선으로 필적을 분석한 결과, 그 글씨는 뭉크 본인의 것이었습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 제작 연도: 1893년
- 기법: 판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
- 크기: 91 × 73.5 cm
- 판본: 1893~1910년에 회화 두 점, 파스텔 두 점, 그리고 여러 점의 판화가 제작되었습니다
- 미술 사조: 표현주의
- 소장처: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오슬로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절규』를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강렬한 색채나 기이한 형태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공포, 곧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을 시각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림이 외부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 작품은 반대 방향을 봅니다. 뭉크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공황 상태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보는 사람은 그림 속 인물에게서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하나가 아닙니다. 뭉크는 1893년부터 1910년 사이에 회화 두 점과 파스텔 두 점, 그리고 여러 점의 판화로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만들었습니다. 각 판본은 색과 질감이 조금씩 다릅니다.
역사적 배경
1893년의 유럽은 전환기에 있었습니다. 산업화가 사회 구조를 흔들었고, 니체의 철학이 퍼지면서 신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미술에서는 사실주의의 틀을 벗어나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뭉크는 그 흐름의 앞자리에 있었습니다. 1892년 베를린 예술가 협회 전시에서 그의 작품은 큰 논란을 일으켰고, 전시는 일주일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오히려 그를 유럽 전위 예술계의 중심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표현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직전에 나왔습니다. 이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에곤 실레를 비롯한 화가들이 뭉크에게서 출발합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먼저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핏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이 하늘은 배경이 아니라 이 그림의 출발점입니다. 뭉크는 1892년 1월 22일 일기에 그 경험을 적었습니다.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고, 해가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으며, 자신은 불안에 떨며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는 내용입니다.
이 붉은 하늘의 정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입니다. 이후 몇 달 동안 유럽 전역에서 핏빛 노을이 관측되었습니다. 다만 그림이 그려진 시점과 구 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노르웨이에서 겨울에 나타나는 진주운입니다. 물결치듯 층을 이루는 그 구름의 형태가 이 화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음으로 중앙의 인물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해골처럼 뒤틀린 얼굴, 크게 벌린 입, 두 손으로 양 뺨을 감싼 자세입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정리해야 합니다. 이 인물은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습니다. 뭉크는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을 들었다고 적었고, 그가 사용한 독일어 제목은 ‘자연의 비명’이었습니다. 인물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귀를 막고 있습니다.
배경의 다리 위 두 검은 실루엣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무관심하게 서 있고, 그 무관심이 중앙 인물의 고립을 강조합니다.
구도에서는 곡선과 직선이 충돌합니다. 하늘과 인물은 물결치고, 다리의 난간은 직선으로 화면을 가릅니다. 혼란한 내면과 차가운 현실이 한 화면에서 부딪히는 구조입니다. 색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붉은 하늘과 차가운 파란 피오르가 서로를 밀어냅니다.
그리고 그가 그 경험을 한 장소인 에케베르그 언덕은 중립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아래쪽에는 도살장이 있었고, 가까이에는 그의 누이 라우라가 입원해 있던 가우스타 정신병원이 있었습니다.
구름 속의 문장
1895년, 뭉크는 고향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처음으로 이 그림을 공개했습니다.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요한 샤르펜베르크라는 의대생이 공개적으로 그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 무렵 뭉크는 완성된 그림의 구름 속에 연필로 한 문장을 적어 넣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다는 문장입니다.
2021년 국립미술관의 조사가 이를 확인했습니다. 큐레이터 마이 브리트 굴렝은 뭉크의 일기와 편지에 남은 필적을 이 문장과 단어 단위, 글자 단위로 대조했습니다. 보존가 티에리 포드는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연필 선이 물감층 위에 물리적으로 얹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에 쓰였다는 뜻입니다.
굴렝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뭉크는 이 문장을 구름 속에 써넣음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인식될 것인지를 스스로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비난을 부정하는 대신 자기 그림 안으로 끌어들인 셈입니다.
네 판본 가운데 이 문장이 있는 것은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본, 곧 이 작품뿐입니다. 육안으로도 보이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실물 앞에 서신다면 왼쪽 위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확인은 최근 이십여 년 사이에 도록의 설명을 뒤집은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여기에 정리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에 대하여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열네 살에 누이 소피에를 결핵으로 잃었습니다. 또 다른 누이 라우라는 정신 질환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기억하는 한 언제나 깊은 불안에 시달렸고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려 했으며, 이 불안과 병이 없었다면 자신은 키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슬로에서 미술을 배운 뒤 파리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했고, 사랑과 공포와 죽음을 다룬 연작 『생명의 프리즈』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그 연작의 핵심입니다.
1908년 신경 쇠약으로 코펜하겐의 요양원에 입원했고, 이후 그의 화면은 다소 밝아집니다. 1944년 오슬로 근교 에켈리에서 여든하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산과 영향
이 작품이 남긴 영향은 미술사를 넘어섭니다. 20세기 표현주의의 토대가 되었고, 오늘날 대중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영화 『스크림』의 마스크, 무수한 패러디와 밈, 팝아트 작품이 모두 이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1895년의 파스텔 판본은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약 1억 1,990만 달러에 낙찰되어 당시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도난 사건도 두 차례 있었습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막일에 국립미술관 소장본이 도난당했다가 같은 해 회수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뭉크 미술관 소장본이 『마돈나』와 함께 무장 강도에게 도난당했고, 2006년에 손상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1893년 판본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미술관은 2022년 새 건물로 이전해 재개관했으며, 오슬로 시청 근처 피오르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습니다.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개관 시간과 예약 여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수기에는 대기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같은 도시의 뭉크 미술관(MUNCH)에는 다른 판본과 『마돈나』, 『뱀파이어』 등이 있습니다. 이 미술관도 2021년 비외르비카에 새로 문을 열었습니다. 두 곳을 함께 보면 서로 다른 판본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파스텔 판본 하나는 개인 소장이라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비명이 아니라 침묵입니다. 소리를 내는 것은 자연이고, 인물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쪽 구름 속에, 화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적어 넣은 한 줄이 백삼십 년째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 Skrik – 에드바르 뭉크, 1893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