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이 그림에는 대각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1920년대 중반, 데 스테일을 함께 만든 테오 판 두스뷔르흐가 화면을 45도로 기울이기 시작하자 몬드리안은 그를 떠났습니다. 그에게 수직과 수평은 양식이 아니라 세계의 구조에 관한 진실이었고, 기울어진 선은 배신이었습니다. 1930년의 이 화면에 사선이 한 줄도 없는 이유입니다.
기본 정보
- 작가: 피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
- 제목: 자료에 따라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또는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II』로 표기됩니다
- 제작 연도: 1930년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46 × 46 cm
- 미술 사조: 데 스테일 (De Stijl) / 신조형주의
- 소장처: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Kunsthaus Zürich)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실물을 처음 본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작다는 것입니다. 한 변이 46센티미터인 정사각형, A2 용지보다 작습니다. 포스터와 머그컵과 원피스를 통해 이 이미지를 이미 수백 번 본 사람에게 이 크기는 당혹스럽습니다. 기념비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고 갔다가, 손을 뻗으면 양쪽 끝에 닿는 화면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작은 화면 안에 있는 것은 검은 선과 세 가지 색, 그리고 흰 면뿐입니다. 몬드리안은 자연의 형태를 지우고 이 요소들만으로 현실의 근본 구조를 그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려던 다른 추상화가들과 그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그가 그리려 한 것은 자기 내면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화면이 완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른쪽 위의 큰 빨간 사각형은 네 변 가운데 두 변만 검은 선으로 막혀 있고, 나머지 두 변은 캔버스의 가장자리입니다. 즉 이 사각형은 화면 밖에서 잘려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격자는 액자 안에서 끝나지 않고 바깥으로 계속됩니다.
역사적 배경
데 스테일은 1917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몬드리안, 판 두스뷔르흐, 바르트 판 데르 레크가 중심이었고, 화가뿐 아니라 건축가도 참여했습니다. 1차 대전으로 네덜란드가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 오히려 이 집단을 결속시켰습니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방식을 신조형주의라 불렀습니다. 수직선과 수평선, 삼원색, 그리고 흰색과 검정과 회색. 이 제한된 어휘로 보편적인 것에 도달한다는 원칙입니다.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야 보편에 이른다는 그의 생각은 신지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24년 무렵 판 두스뷔르흐가 화면을 45도 기울인 ‘반구성’ 연작을 내놓으며 이를 요소주의라고 명명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이것은 원칙의 훼손이었습니다. 그는 데 스테일을 떠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함께 만든 두 사람이 선의 각도 때문에 갈라선 것입니다.
1930년은 대공황이 유럽으로 번지던 해였습니다. 파리는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뒤엉킨 곳이었고, 그 소란 속에서 몬드리안은 정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더 줄이고, 더 엄격해지는 쪽이었습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색면의 배치. 오른쪽 위를 큰 빨간 사각형이 차지합니다. 왼쪽 아래에 작은 파란 사각형,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잘려 나간 듯한 노란 사각형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흰 면입니다. 세 색의 크기는 완전히 불균등한데, 화면은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큰 빨강의 무게를 작은 파랑과 노랑이 대각 방향에서 받쳐 주기 때문입니다. 좌우 대칭이 아니라 힘의 균형입니다.
선의 굵기. 검은 선들의 두께가 모두 같지 않습니다. 미세한 차이가 화면에 리듬을 만들고, 어떤 면이 앞으로 나오고 어떤 면이 뒤로 물러나는지를 결정합니다.
흰색은 배경이 아닙니다. 흰 면들도 각각 크기와 위치가 계산된 하나의 요소입니다. 몬드리안에게 빈 곳은 남은 자리가 아니라 채운 자리였습니다.
표면. 도판에서는 매끈해 보이지만 실물의 검은 선에는 붓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 선들을 자로 그은 것이 아니라 손으로 그렸고, 여러 번 지우고 다시 그렸습니다. 완성까지 수없이 조정을 반복한 흔적이 표면에 남아 있습니다.
1929년의 형제 작품. 이 그림은 전년도에 그린 작품의 변주입니다. 선의 골격은 거의 같고, 달라진 것은 왼쪽 세로 띠를 세 개의 불균등한 사각형으로 나누고 그중 하나를 파랑으로 칠한 것입니다. 몬드리안에게 정해진 공식은 없었습니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풀었습니다.
피트 몬드리안에 대하여
몬드리안은 1872년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드로잉 교사였고, 그도 처음에는 인상주의 풍의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나무와 풍차와 바다를 그리던 시절의 작품이 상당수 남아 있습니다.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입체주의를 접한 뒤 이듬해 파리로 옮겼습니다. 이후 그의 나무 연작은 점점 형태를 잃고 선의 격자로 수렴해 갑니다. 자연에서 출발해 추상에 도달한 경로가 작품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는 갑자기 추상화가가 된 것이 아닙니다.
1938년 런던으로, 1940년 뉴욕으로 옮겼습니다. 뉴욕에서 그는 재즈와 도시의 격자에 반응해 검은 선을 색의 점선으로 바꿉니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3)가 그 결과입니다. 이십 년 넘게 지킨 원칙이 마지막에 스스로 느슨해진 셈입니다. 1944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산과 영향
가장 직접적인 계승은 건축과 가구에서 나타났습니다. 헤릿 리트펠트의 적청 의자(1918)와 위트레흐트의 슈뢰더 주택(1924)은 이 회화 언어를 삼차원으로 옮긴 것입니다. 슈뢰더 주택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패션에서는 1965년 이브 생 로랑이 몬드리안 드레스를 발표하며 이 격자를 대중의 옷장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픽 디자인과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그리드 개념도 같은 계보에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하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몬드리안풍’이라 부르는 것은 대체로 장식 패턴입니다. 몬드리안 자신에게 이것은 패턴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주장이었습니다. 그가 친구와 결별하면서까지 지킨 것도 그 주장이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스위스 취리히의 쿤스트하우스 취리히에 있습니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트램으로 10분 안팎이며, 미술관은 2021년 문을 연 신관 건물이 더해져 규모가 크게 늘었습니다.
휴관일과 개관 시간, 요금은 변동이 있으므로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소장품 전시 구성도 바뀌므로 특정 작품을 목표로 가신다면 함께 확인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미술관은 노르웨이 밖에서 가장 큰 뭉크 컬렉션을 가지고 있고, 자코메티 소장으로도 유명합니다. 몬드리안 한 점만 보고 나오기에는 아까운 곳입니다. 관람 후에는 도보 거리의 구시가지와 취리히 호수를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단순함이 아니라 완고함입니다. 46센티미터 정사각형 안에서 몬드리안은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선은 반드시 수직이거나 수평이고, 색은 반드시 세 가지이며, 나머지는 흰색입니다.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이 만든 운동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미지: 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 Piet Mondrian (1930),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