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이 상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옆에 선 다른 상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얼핏 닮았지만 머리에 쓴 관부터 다릅니다. 이 상은 해와 초승달을 결합한 높고 화려한 관을 썼고, 옆의 상은 낮고 단순한 관을 썼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도 반세기쯤 차이가 납니다. 같은 자세를 취한 두 몸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기본 정보
- 공식 명칭: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010년 이전 명칭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
- 지정: 1962년 12월 20일 국보 지정. 옛 지정번호 제78호
- 제작 시기: 삼국시대, 6세기 후반
- 제작지: 미상. 백제설과 신라설이 함께 제기됩니다
- 기법: 금동, 밀랍주조법
- 높이: 83.2 cm
- 미술 사조: 삼국시대
-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사유의 방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반가사유상이라는 형식 자체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세를 이 정도의 밀도로 밀어붙인 예는 삼국시대의 이 두 점뿐입니다. 석굴암 조각과 함께 한국 불교조각의 최고 성취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자세를 정확히 보시기 바랍니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반가부좌를 틀고, 왼손은 오른쪽 발목 위에 얹었으며, 오른팔의 팔꿈치를 무릎에 괸 채 손가락을 뺨에 가볍게 댑니다. 손가락은 뺨에 닿아 있는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미묘한 거리에 있습니다. 이 한 지점에 조각 전체의 긴장이 걸려 있습니다.
존명에 대해서는 미륵보살로 보는 견해가 한국과 일본에서 우세합니다. 미래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미륵의 행적이 출가 전 싯다르타 태자의 그것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자세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고뇌하는 태자를 나타내는 태자사유형에서 나왔습니다. 즉 이것은 깨달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역사적 배경
6세기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하고 있었고 불교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념이었습니다. 각 나라가 경쟁적으로 불상을 만들면서 금속 공예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이 상의 출토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통 경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제에서 만들어졌는지 신라에서 만들어졌는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이면서 어느 나라 것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한반도의 반가사유상은 일본 아스카·하쿠호 시대 조각에 직접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교토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자세와 인상이 놀랍도록 닮아, 두 나라 미술사 연구에서 늘 함께 논의됩니다.
제작 방식
이 상은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철심으로 틀을 세우고 점토로 안쪽 원형을 빚은 다음, 그 위에 밀랍을 입혀 최종 형태를 조각합니다. 다시 바깥에 점토를 발라 굳히고 열을 가하면 밀랍이 녹아 빠져나가고, 그 빈 공간에 청동 쇳물을 붓습니다. 식힌 뒤 겉틀을 깨면 청동상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금을 입힙니다.
한 번의 실패가 전체의 실패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최근 비파괴 성분 분석과 감마선 촬영, 3D 스캔으로 내부를 들여다본 결과, 이 상에도 곳곳에 주조 결함과 보수의 흔적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완벽의 대명사로 불려온 조각이 실은 여러 번 손을 본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실이 이 상의 가치를 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1400여 년 전 장인들이 무엇과 씨름했는지를 알려줍니다.
감상 포인트
보관. 이 상의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탑처럼 솟은 장식이 달린 높은 관으로,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형식이어서 일월식이라 부릅니다. 서역 계통의 도상이 들어와 있다는 근거로 자주 언급됩니다.
상체와 천의. 이 상은 상반신에 천의를 걸치고 있으며, 그 자락이 몸 앞에서 교차하며 허리띠와 함께 율동적인 흐름을 만듭니다. 옆에 놓인 83호 상이 상반신을 드러내고 단순한 목걸이만 걸친 것과 정확히 대비됩니다.
얼굴. 눈꺼풀은 반쯤 내려와 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집니다. 웃는다고 하기에는 약하고 무표정이라 하기에는 분명한, 판정하기 어려운 표정입니다.
금의 상태. 도금은 세월에 상당 부분 벗겨졌습니다. 그 아래 청동이 드러난 부분과 남은 금빛이 섞이면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번쩍이는 인상과는 전혀 다른 표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 색은 제작자가 의도한 색이 아닙니다.
두 상의 비교. 사유의 방에서는 반드시 두 점을 오가며 보시기 바랍니다. 78호는 6세기 후반, 화려한 관과 복잡한 옷자락. 83호는 7세기 전반, 낮은 관과 벗은 상체, 훨씬 단순하고 입체적인 몸. 반세기 사이에 무엇이 덜어졌는지가 보입니다.
만든 사람에 대하여
이 상을 만든 장인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에 불상을 제작한 장인들은 왕실이나 사원에 속한 전문 집단이었고, 개인의 이름을 남기는 관행이 없었습니다.
다만 작품이 요구하는 기술 수준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83센티미터 높이의 청동상을 얇은 벽으로 주조하면서 손가락 끝의 미묘한 거리까지 통제하는 일은, 오랜 훈련과 축적된 실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유산과 영향
이 상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널리 쓰입니다. 우표와 교과서, 각종 홍보물에 반복해서 등장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두 상을 위한 별도의 전시 공간까지 만들었습니다.
2016년에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83호 상과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했지만, 고류지 측이 해외 전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무산되었습니다. 대신 이 78호 상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에서는 주구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왔습니다.
2021년 사유의 방 개관을 앞두고 박물관은 두 상의 애칭을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지정번호를 쓰지 않게 되면서 부를 이름이 마땅치 않아진 탓이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사유의 방에 있습니다. 2021년 11월 12일 문을 연 전용 공간으로, 이전에는 1층 불교조각실에서 83호 상과 번갈아 전시되었지만 지금은 두 점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전시실은 어둡고, 바닥은 완만하게 기울어져 있으며, 두 상 외에 다른 유물이 없습니다. 한 바퀴 돌아 뒷면까지 볼 수 있게 배치되어 있으니 정면에서만 보고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뒷모습에서 옷자락의 흐름과 주조 방식이 훨씬 잘 보입니다.
상설 전시는 무료입니다. 지하철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에서 도보 5분 거리이며, 개관 시간과 야간 개장 요일은 변동이 있으므로 방문 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개관 직후가 가장 한산합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고해상도 이미지와 해설을 제공하며, 3D로 회전시켜 볼 수 있는 자료도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 상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미소가 아니라 손가락입니다. 뺨에 닿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 거리에서, 조각은 생각이 끝난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는 중인 상태를 붙잡고 있습니다. 1400년 동안 이 사람은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미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옛 지정번호 국보 제78호), 삼국시대 6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