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 이 건물을 지은 돈이 어디서 왔는가
이 건물을 지은 돈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비문학자 게자 알푈디는 남아 있는 돌에 뚫린 못 구멍을 분석해 원래의 헌정 비문을 복원했습니다. 금속 글자를 고정하던 구멍의 배열에서 문장을 읽어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 원형극장이 ‘전리품으로(ex manubiis)’ 지어졌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에서 얻은 전리품입니다. 그리고 그 공사에 동원된 노동력의 상당수는 그때 끌려온 유대인 포로들이었습니다.
기본 정보
- 원래 이름: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Amphitheatrum Flavium)
- 건설: 서기 72년경 착공, 80년 완공.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증축
- 발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설계자의 이름은 전하지 않습니다
- 재료: 트래버틴, 응회암, 로마 콘크리트, 벽돌
- 크기: 장축 약 189m, 단축 약 156m, 높이 약 48m
- 수용 인원: 5만~8만 명으로 추정
- 미술 사조: 고대 미술
- 소재지: 이탈리아 로마.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 건물이 세워진 이유
서기 64년 대화재로 로마 중심부가 비었습니다. 네로는 그 땅을 차지해 도무스 아우레아라는 개인 저택을 짓고 인공 호수까지 팠습니다.
네로가 죽고 서기 69년의 내전이 끝난 뒤 권력을 잡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정통성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네로가 사유화한 땅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공 호수의 물을 빼고 그 자리에 시민을 위한 원형극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 건물은 건축이기 이전에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전임자의 사치가 있던 자리에 공공 오락시설을 세우는 것, 그것이 메시지였습니다.
비용은 유대 전쟁의 전리품에서 나왔습니다. 앞서 말한 알푈디의 비문 복원이 그 근거입니다. 요세푸스는 이 전쟁에서 사로잡힌 사람이 구만 칠천 명에 이른다고 기록했습니다. 상당수가 노예 상인에게 팔려 제국 각지로 흩어졌고, 로마로 온 이들 중 일부가 이 건물을 쌓았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서기 79년에 죽었습니다. 아들 티투스가 80년에 개관하고 백 일간의 개장 경기를 열었습니다. 이후 도미티아누스가 지하 구조와 최상층을 더했습니다.
건축과 감상 포인트
네 개의 층. 아래에서부터 토스카나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반열주로 붙어 있고, 그 위 네 번째 층은 창이 뚫린 벽면에 코린트식 필라스터가 붙은 형태입니다. 그리스에서 온 세 가지 양식을 하나의 건물에 위계로 쌓아 올린 구성이며, 이후 유럽 건축이 이 배열을 반복해서 인용합니다.
돌에 뚫린 무수한 구멍. 외벽을 가까이서 보면 표면이 곰보처럼 패어 있습니다. 트래버틴 블록은 모르타르 없이 쌓고 약 삼백 톤의 철제 꺾쇠로 고정했는데, 중세에 그 철을 뽑아 가면서 생긴 자국입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채석장이자 고철 창고였습니다.
사라진 남쪽 벽. 외벽의 한쪽이 통째로 없는 이유는 1349년 지진입니다. 그 이전에도 847년과 1231년에 큰 붕괴가 있었습니다. 떨어져 나온 트래버틴은 성 베드로 대성당, 팔라초 베네치아, 팔라초 바르베리니 등에 쓰였습니다. 로마의 여러 건물 안에 콜로세움의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지하(휘포게움). 도미티아누스 대에 만들어진 이층 구조의 미로입니다. 검투사와 맹수를 대기시키던 방들, 그리고 그들을 아레나로 올리는 승강 장치가 있었습니다. 도르래와 밧줄로 작동하는 목재 리프트였고, 아레나 바닥에는 그것들이 올라오는 뚜껑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벨라리움. 관중석 위로 천을 펼쳐 햇빛을 가리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조작은 미세눔 함대에서 파견된 수병들이 맡았습니다. 배의 돛을 다루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좌석의 계급. 자리는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아래쪽일수록 신분이 높았습니다. 사회 구조가 그대로 좌석 배치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검투사 경기, 맹수 사냥, 공개 처형이 열렸습니다.
모의 해전에 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시우스 디오는 개장 행사에서 물을 채운 경기가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아레나에 물을 채우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는지는 논쟁 중입니다. 확실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지하 구조를 만든 뒤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있었다면 아주 초기의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콜로세움에서의 순교를 입증하는 사료는 없습니다.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이곳을 순교지로 축성하면서 굳어진 전승에 가깝습니다.
검투사 경기는 서기 435년경을 마지막으로 기록에서 사라지고, 맹수 사냥은 52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
설계자의 이름은 전하지 않습니다. 로마 건축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성취로 기록되었고, 건물에 새겨지는 것은 황제의 이름이었습니다.
다만 노동력의 성격은 앞서 말한 대로 상당 부분 밝혀져 있습니다. 자유 장인도 있었지만, 유대 전쟁의 포로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 건물의 규모는 그 사실과 분리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유산과 영향
타원형 평면, 방사형 통로, 다수의 출입구를 통한 신속한 입퇴장. 이 세 가지는 오늘날 경기장 설계의 기본 원리로 남아 있습니다. 팔십 개의 출입구를 통해 오만 명이 빠져나가는 구조는 현대 스타디움이 여전히 참고하는 해법입니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07년에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었습니다. 후자는 민간 재단이 진행한 인터넷 투표였으므로 유네스코 등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현대에 이 건물은 다른 의미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 어딘가에서 사형 선고가 감형될 때마다 로마시는 콜로세움을 금빛으로 밝힙니다. 사람을 죽이는 구경거리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 사형 반대의 표지가 된 것입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도 이 건물은 표준적인 참조 대상이었습니다. 브뤼헐이 『바벨탑』을 그릴 때 참고한 것도 이 아치 구조입니다. 벽돌 골조 위에 석재를 붙이는 로마식 공법까지 그 화면에 들어가 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로마 시내 중심부, 포로 로마노 동쪽에 있습니다. 지하철 B선 콜로세오 역에서 나오면 바로 앞입니다.
사전 예매는 필수입니다. 2024년 이곳을 찾은 사람은 1,470만 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을 받은 문화 시설이었습니다. 현장 구매 줄은 매우 깁니다.
- 통합권을 사면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에 함께 입장할 수 있습니다.
- 지하 구역과 최상층은 별도 예약이 필요하며 수량이 제한됩니다. 지하를 보시려면 미리 잡으셔야 합니다.
- 요금과 예약 방식은 자주 바뀌므로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른 아침이 가장 한산합니다. 여름 한낮은 그늘이 거의 없어 매우 덥습니다.
인근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바로 붙어 있고, 판테온도 도보권입니다. 두 건물을 같은 날 보면 로마 건축이 아치와 돔이라는 두 해법으로 무엇을 했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규모가 아니라 표면입니다. 돌 전체가 곰보처럼 패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사람이 뽑아 간 자국입니다. 이 건물은 지어질 때도, 무너질 때도,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Colosseum, 로마, 서기 80년 완공.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