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Jar (Joseon White Porcelain) by Unknown, 18th century

달항아리 (조선 백자)

1935년 서울에서 달항아리 한 점을 사서 영국으로 가져가던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 그 항아리는 훗날 도예가 루시 리의 작업실에 수십 년간 놓여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영국박물관으로 갔습니다. 리치가 그것을 살 때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항아리는 장아찌를 담그던 그릇이었습니다.

기본 정보

  • 공식 명칭: 백자 달항아리 (2011년 이전에는 ‘백자대호’)
  • 제작 시기: 17세기 후기~18세기 전기, 특히 18세기 전반 50년
  • 제작지: 경기도 광주, 사옹원 분원 관요 – 특히 금사리 가마(약 1720~52년)
  • 기법: 백자, 상하 두 부분을 따로 물레로 올려 접합
  • 크기: 통상 높이와 몸체 지름이 40cm 이상. 개별 유물마다 다릅니다
  • 미술 사조: 조선 미술
  • 소장: 단일 소장처가 없습니다. 국가지정 유산만 7점이며, 그 밖에도 국내외에 여러 점이 전합니다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달항아리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미술사학자이자 국립박물관장이었던 최순우가 남긴 것입니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고 둥근 원을 그린 것도 아닌, 그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는 말입니다. 이 한 문장이 달항아리를 설명하는 방식을 정했습니다.

비대칭은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제작 방식의 결과입니다. 높이 40센티미터가 넘는 백자는 태토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한 번에 물레로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아래 반구를 따로 만들어 말린 뒤 흙물로 붙입니다. 가마에 들어가면 접합부가 미세하게 주저앉고 형태가 살짝 이지러집니다. 도공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재료와 불이 남긴 흔적입니다. 그것을 결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20세기의 일입니다.

또 하나. 이 정도 크기의 백자를 아무 장식 없이 남긴 것은 조선뿐입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의 백자는 삼채와 오채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조선에도 순백의 병과 접시와 연적은 많았지만, 이만한 크기에서 무늬를 완전히 비운 사례는 다른 곳에 없습니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고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15세기부터 백자는 왕실의 공식 자기가 되었고, 사옹원의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두고 생산을 관리했습니다. 광주 일대에는 340곳이 넘는 가마터가 흩어져 있었는데, 달항아리는 그중에서도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가마는 1720년경부터 1750년대 초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시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에서 벗어나 조선 사회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하던 때였습니다. 숙종에서 영조에 이르는 이 백 년 사이에 달항아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름이나 꿀 같은 액체를 담는 저장 용기였다는 설, 곡식을 담았다는 설, 꽃을 꽂는 화기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리치가 서울에서 이 항아리를 살 때 그것이 장아찌 항아리로 쓰이고 있었다고 기록했고, 일본인들이 양반가에서 뒤주 위에 올려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지금 미술관 유리장 안에 놓인 이 물건은 원래 부엌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름에 관하여

‘달항아리’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20세기에 생긴 이름입니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불렀는지는 학술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늘 함께 거론됩니다. 골동상 홍기대의 회고에 따르면 화가 김환기가 백자대호를 특히 좋아해 달항아리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김환기 자신은 자신의 모든 예술이 조선백자와 백자 항아리에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한 축은 최순우입니다. 그의 글을 통해 이 이름이 대중에게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공식 명칭이 정리된 것은 훨씬 뒤입니다. 2011년 문화재청이 유물 명칭을 정비하면서 ‘백자대호’를 ‘백자 달항아리’로 바꿨습니다. 일상어가 학술 용어를 밀어낸 드문 사례입니다.

한 가지 더. 2021년부터 국보와 보물의 지정번호는 공식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번호가 서열처럼 오해된다는 이유였습니다. 2024년에는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문화재’가 ‘국가유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래된 글에서 보게 되는 ‘국보 제262호’ 같은 표기는 지금은 쓰지 않는 형식입니다.

감상 포인트

접합선. 몸체 가운데를 옆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위아래를 이어 붙인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이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입과 굽의 비례. 달항아리는 굽 지름이 입 지름보다 짧습니다. 그래서 위쪽이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무겁게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색. 유백색이 기본이지만 유약에 푸른 기가 도는 경우가 많아 각도에 따라 담청빛으로 보입니다. 리움 소장품처럼 표면에 자연스러운 얼룩이 남은 예도 있는데, 오동나무 기름이 배어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래 쓰인 흔적입니다.

번조 흔적. 굽 바닥에는 가는 모래를 받쳐 구운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전시장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도록 사진에서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든 사람에 대하여

달항아리를 만든 도공의 이름은 한 사람도 전하지 않습니다. 관요에 소속된 장인들은 국가의 명에 따라 일했고, 기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기술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구 두 개를 따로 올리고, 수축률을 맞춰 말리고, 접합하고, 1300도 가까운 온도에서 무너지지 않게 구워야 합니다. 성공률은 낮았을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그 실패의 더미 위에 남은 소수입니다.

유산과 영향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 소장품입니다. 1935년 버나드 리치가 서울에서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도예가 루시 리가 오랫동안 작업실에 두고 지냈고 그의 사후 영국박물관에 들어갔습니다. 또 하나는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으로, 300여 조각으로 깨진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이 두 점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특별전에 출품되어 잠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현대 도예에서도 달항아리는 계속 만들어집니다. 권대섭, 박영숙, 이기조 같은 작가들이 전통 방식으로 이 형태를 이어가고 있으며, 국제 경매에서도 현대 달항아리가 거래됩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대는 달항아리 형태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장식을 비우고 형태만으로 성립하는 이 방식은 현대 미니멀리즘 디자인과 자주 나란히 놓입니다. 다만 순서를 혼동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달항아리는 미니멀리즘을 앞서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그 자리에 도달한 것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달항아리는 한 곳에 모여 있지 않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 보물로 지정된 높이 41cm의 달항아리를 비롯한 백자 소장품이 있습니다. 상설 전시는 무료이며, 도자공예 전시실은 3층에 있습니다. 지하철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에서 도보 5분입니다.
  • 국립고궁박물관(서울 경복궁): 높이 45cm의 국보 달항아리가 기탁되어 있습니다.
  • 리움미술관(서울 한남동): 표면의 얼룩으로 유명한 국보 달항아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 용인대학교 박물관(경기 용인): 높이 49cm, 1991년에 국보로 지정된 달항아리가 있습니다.
  • 영국박물관(런던)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해외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점입니다.

다만 도자기는 상설 전시에서 교체되는 경우가 많고, 개인 소장품과 기탁품은 공개 여부가 달라집니다. 특정 유물을 목표로 가신다면 방문 전에 각 기관 홈페이지에서 현재 전시 여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항아리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도공은 완벽한 구를 만들려고 했고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한 형태를 삼백 년 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물건은 그대로였고, 바뀐 것은 보는 눈이었습니다.

이미지: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용인대학교 박물관 소장(1991년 국보 지정).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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