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 du moulin de la Galette by Pierre-Auguste Renoir, 1876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 이 그림은 두 점이다

이 그림은 두 점입니다. 오르세에 걸린 131 × 175 cm짜리와, 78 × 114 cm짜리 작은 판본. 두 화면은 크기를 빼면 거의 동일하고, 어느 쪽이 먼저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에 걸린 것이 어느 쪽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카탈로그가 작품 크기를 적어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본 정보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르누아르는 여기서 왕족도 신화 속 인물도 아닌, 일요일 오후에 춤추러 나온 몽마르트르 사람들을 대형 화면의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화면 크기 자체가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크기는 역사화에 배정되던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빛의 처리입니다. 아카시아 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 얼굴과 옷 위에 불규칙한 얼룩을 만듭니다. 르누아르는 그 그림자를 검게 칠하지 않고 푸른빛과 보랏빛으로 처리했습니다. 당대 비평가들에게 이것은 인물들이 곰팡이가 핀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화면에서 느끼는 어른거림은 바로 그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중앙에서 춤추는 커플이 있지만 그들이 주인공은 아닙니다. 왼쪽 앞의 대화 무리, 뒤쪽의 군중, 화면 밖으로 이어지는 인파. 시선은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고 계속 미끄러집니다. 무도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의 시야가 실제로 그렇습니다.

역사적 배경

물랭 드 라 갈레트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남아 있던 옛 풍차를 개조한 야외 무도장이었습니다. 이름의 ‘갈레트’는 그곳에서 팔던 작은 과자에서 왔습니다. 일요일이면 인근의 노동자와 재봉사, 점원들이 차려입고 나와 춤추고 마시고 갈레트를 먹었습니다.

1876년의 파리는 1871년 파리 코뮌의 유혈 사태에서 막 벗어나던 참이었습니다. 오스만의 도시 개조로 대로가 뚫렸고,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1874년 첫 그룹전으로 아카데미에 도전한 뒤 조롱과 무시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르누아르의 친구이자 이 그림에 등장하는 비평가 조르주 리비에르는 회고록에서 르누아르가 무도장에서 직접 그렸으며 바람이 여러 번 캔버스를 넘어뜨릴 뻔했다고 적었습니다. 동시에 르누아르는 바로 옆 코르토 거리에 정원이 딸린 낡은 집을 빌려 작업실로 썼습니다. 이 크기의 화면을 온전히 야외에서 완성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현장 작업과 작업실 작업이 섞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판본 가운데 어느 쪽이 현장에서 나온 것인지도 이 의문의 일부입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등장인물. 화면 왼쪽 앞 탁자에 앉은 사람들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비평가 조르주 리비에르, 화가 노르베르 괴뇌트와 피에르프랑 라미, 그리고 프레데리크 코르데입니다. 벤치에 앉은 여성은 에스텔, 화면에서 춤추는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은 르누아르가 자주 쓴 모델 마르그리트 르그랑입니다. 익명의 파리 사람들과 이름 있는 친구들이 한 화면에 섞여 있고, 어느 쪽도 특별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그림자의 색. 인물들의 얼굴과 흰 옷 위에 떨어진 얼룩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회색이 아니라 푸른색과 보라색입니다. 이것이 인상주의가 발견한 것이고, 동시에 당대 관객이 가장 견디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가장자리. 화면 오른쪽과 위쪽에서 인물들이 잘려 나갑니다. 무도장은 캔버스 밖으로 계속됩니다. 르누아르는 장면을 담은 것이 아니라 잘라낸 것입니다.

빈 잔과 병. 앞쪽 탁자 위의 유리병과 잔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물화와 풍경 사이에 작은 정물이 끼어 있습니다. 몇 해 뒤 『뱃놀이 파티의 오찬』에서 르누아르는 같은 조합을 훨씬 더 밀도 있게 다시 시도합니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에 대하여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리모주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파리로 옮겼습니다. 열세 살에 도자기 공방에 들어가 접시에 꽃을 그리는 일부터 배웠고, 이후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모네, 시슬레, 바지유를 만났습니다.

그의 화면에는 일관되게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이 도시의 소외나 노동의 고단함을 다룰 때, 르누아르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순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점은 그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고 장점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말년에는 심한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손이 굳어 붓을 손에 묶고 그렸습니다. 191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산과 영향

이 그림이 오늘날 파리에 있는 것은 한 사람 덕분입니다. 화가이자 수집가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이 작품을 사들였고, 1894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인상주의 컬렉션을 국가에 유증했습니다. 국가는 선뜻 받지 않았습니다. 긴 협상 끝에 마흔 점만 수용되어 1896년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렸고, 그것이 인상주의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루브르를 거쳐 1986년 오르세로 옮겨졌습니다.

작은 판본의 운명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의 사업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존 헤이 휘트니가 소유했고, 1990년 5월 17일 그의 미망인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낙찰가는 7,810만 달러.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그림이었습니다. 가장 비싼 그림은 이틀 전 같은 사람이 사들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었습니다. 구매자는 일본 다이쇼와 제지의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였습니다.

이듬해 사이토는 자신이 죽으면 두 그림을 시신과 함께 화장하겠다고 말해 국제적인 비난을 불렀습니다. 다행히 그의 회사가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면서, 그림을 담보로 잡고 있던 은행들이 조용히 매각했습니다. 작은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현재 스위스의 개인 소장품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화가가 같은 해에 그린 거의 같은 화면 두 점이, 하나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국가 소장품이 되고 하나는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는 사유물이 된 것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오르세 미술관 소장본은 파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센강 좌안, 옛 기차역을 개조한 건물입니다.

휴관일은 월요일이고 목요일은 야간 개장을 합니다. 온라인 사전 예약을 권하며, 오전 개관 직후가 가장 한산합니다. 전시실 배치는 종종 조정되므로 방문 전에 공식 웹사이트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미술관에 모네의 『수련』과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있습니다.

몽마르트르에 가신다면 물랭 드 라 갈레트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풍차는 남아 있고, 무도장은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식당이 있습니다. 르누아르가 캔버스를 들고 올라갔던 언덕길을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그림의 크기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 평범하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날도, 유명한 사람도, 기념할 사건도 없습니다. 그냥 일요일 오후입니다. 르누아르는 그것에 역사화의 크기를 주었습니다.

이미지: Bal du moulin de la Galette – Pierre-Auguste Renoir (1876), 오르세 미술관 소장본.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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