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고야는 이 그림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열네 점의 벽화 가운데 어느 것에도 제목을 남기지 않았고, 편지에서 언급하지도 않았으며, 누구에게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라는 제목은 그가 죽은 뒤 제자 안토니오 브루가다가 작성한 목록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이 그림을 부르는 이름부터가 추정입니다.
기본 정보
- 작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
- 제작 시기: 1820~1823년경
- 기법: 벽에 그린 그림을 캔버스로 이전
- 크기: 143.5 × 81.4 cm (이전 후 기준)
- 미술 사조: 낭만주의 (Romanticism)
- 소장처: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이 그림은 팔기 위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문도 없었습니다. 고야는 1819년 마드리드 외곽에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리던 저택을 사들였고, 그 집의 벽에 직접 그렸습니다. 관객을 상정하지 않은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 화면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배경은 거의 완전한 검정이고, 그 어둠에서 떠오르는 것은 뒤틀린 몸과 크게 벌어진 입, 그리고 눈입니다. 사투르누스는 자기 자식을 먹으면서 오히려 겁에 질려 있습니다. 가해자의 얼굴에 공포가 있다는 점이 이 그림의 핵심입니다.
손가락도 보시기 바랍니다. 몸을 움켜쥔 손가락이 살 안으로 파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붓질은 거칠고 성급합니다. 이것은 오래 다듬은 화면이 아니라 밀어붙인 화면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사투르누스가 들고 있는 몸은 머리와 한쪽 팔이 이미 없고, 남은 부분의 비례는 어린아이라기보다 성인 여성에 가깝습니다. 제목은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화면은 그것을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역사적 배경
1820년대 초 스페인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자유주의 혁명과 왕정의 반동이 이어졌고, 페르난도 7세의 절대왕정이 복구되었습니다. 고야는 결국 1824년 프랑스로 떠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벼랑 끝에 있었습니다. 일흔이 넘었고 귀가 들리지 않았으며, 1819년에는 죽을 뻔한 병을 앓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귀머거리의 집 벽에 열네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검은 그림’이라 불리는 연작입니다.
어느 그림이 어느 방에 있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1867년 이 집을 방문해 벽화를 살펴본 샤를 이리아르트의 기록과 브루가다의 증언이 현대 연구의 근거인데, 자료마다 배치가 다릅니다. 이 작품을 1층 식당에 두는 설명도, 2층에 두는 설명도 있습니다. 고야 본인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벽에서 캔버스로
고야가 죽은 뒤에도 이 그림들은 오랫동안 그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대중은 그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1873년 프랑스 은행가 에밀 데를랑제 남작이 저택을 사들였고, 벽화를 캔버스로 옮기기로 합니다. 작업은 프라도의 복원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가 1873년부터 1874년에 걸쳐 수행했습니다. 벽에서 회반죽째 떼어내 천에 옮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실이 있었습니다. 상당한 부분이 훼손되었고 보수와 덧칠이 뒤따랐습니다. 다행히 이전 직전에 사진가 장 로랑이 벽에 그대로 붙어 있던 상태의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그 사진과 지금의 캔버스를 비교하면 차이가 확인됩니다. 즉 우리가 프라도에서 보는 화면은 고야가 벽에 남긴 것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데를랑제의 목적은 보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 그림들을 출품했습니다. 반응은 미지근했고, 영국 비평가 P. G. 해머턴은 이 작품들이 부도덕하다고 격하게 비난했습니다. 팔리지 않자 남작은 1880년경 이 연작을 스페인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덧붙이자면, 2003년 미술사학자 후안 호세 훈케라는 귀머거리의 집 2층이 고야 생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들어 검은 그림의 작가가 고야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프라도와 대부분의 연구자는 고야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 논쟁 역시 이 연작의 역사에 속합니다.
사투르누스는 누구인가
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하며, 농경과 시간의 신입니다. 자기 자식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태어나는 아이들을 차례로 삼켰습니다.
이 주제는 고야 이전에도 그려졌습니다. 루벤스가 같은 소재로 남긴 그림이 같은 프라도에 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루벤스의 사투르누스는 신화 속 인물답게 극적이고 조각적입니다. 고야의 사투르누스는 신이 아니라 굶주린 노인처럼 보입니다.
해석은 여러 갈래입니다. 권력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도 하고, 시간이 모든 것을 삼킨다는 오래된 알레고리로 읽히기도 하며, 자식들을 대부분 잃고 하나만 남았던 고야 자신의 상황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것도 본인의 진술로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에 대하여
고야(1746~1828)는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나 궁정화가로 성공했습니다. 1792년경 중병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 작업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의 후기를 시간순으로 따라가면 이 그림의 자리가 보입니다. 1800년 전후의 『나체의 마하』는 아직 세속적이고 감각적입니다. 1814년의 『1808년 5월 3일』에서 그는 처형을 정면으로 그렸지만, 그것은 국가의 주문이었고 관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820년대의 이 그림에는 주문도 관객도 없습니다. 이십 년에 걸쳐 남은 것이 자기 집 벽뿐이었습니다.
유산과 영향
검은 그림 연작은 20세기 미술에 직접 이어졌습니다. 표현주의자들은 왜곡된 형태와 극단적 감정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논리를 벗어난 이미지에서 고야를 선구자로 지목했습니다.
이 작품은 특히 대중문화에서 반복 인용됩니다. 공포영화와 현대 미술에서 자기 자식을 삼키는 형상은 하나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정치를 논하는 글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혁명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이 그림과 함께 인용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있습니다. 검은 그림 열네 점은 한 구역에 함께 전시되므로 한 번에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시실 배치는 조정되므로 입구에서 지도를 받거나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프라도는 월요일에도 문을 엽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8시, 일요일과 공휴일은 오후 7시까지입니다. 성인 입장료는 15유로 안팎, 18세 미만 무료이며 폐관 전 마지막 두 시간가량은 무료 입장 시간대입니다. 요금과 시간은 바뀌므로 방문 전 확인을 권합니다.
같은 미술관에 루벤스가 그린 사투르누스, 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가 있습니다. 도보 거리에 레티로 공원이 있어 관람 후 걷기에 좋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침묵입니다. 고야는 이 그림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어느 벽에 걸었는지 적지 않았고, 왜 그렸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일흔 넘은 나이에, 아무도 오지 않는 집에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이 이것을 그렸다는 사실뿐입니다.
이미지: Saturn Devouring His Son – Francisco Goya, 1820~23년경, 프라도 미술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