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다비드 – 손과 머리가 큰 이유
가까이서 보면 다비드는 이상합니다. 머리가 몸에 비해 큽니다. 오른손은 지나치게 큽니다. 그리고 두 눈은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이 조각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의 부벽 위, 지상에서 스물다섯 미터 높이에 세워질 예정이었습니다. 그 거리에서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비례가 맞도록 계산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각을 설계자가 의도하지 않은 거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기본 정보
- 작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1564)
- 제작 기간: 1501년 9월 13일 착수, 1504년 9월 8일 공개
- 재료: 카라라 대리석
- 크기: 조각상 자체 434cm, 받침대 포함 517cm. 무게 약 6톤
- 미술 사조: 르네상스
- 소장처: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1873년 이전)
버려진 돌
이 대리석 덩어리는 1464년에 채석되었습니다. 그해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작업을 시작했다가 포기했고, 1470년대에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다시 시도했다가 역시 포기했습니다.
이후 이 돌은 사십 년 가까이 대성당 작업장 마당에 방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 지간테’, 곧 거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크기만이 아니었습니다. 돌이 얇았고, 내부에 결함이 있었습니다.
1501년, 스물여섯 살의 미켈란젤로가 이 돌을 맡았습니다. 의뢰는 양모 길드에서 왔고, 완성작은 대성당 부벽 위에 세울 구약의 예언자 상 연작 가운데 하나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왜 비례가 어긋나 있는가
이 조각의 가장 유명한 특징들은 모두 원래의 설치 높이에서 나옵니다.
머리. 몸에 비해 큽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원근으로 인해 위쪽이 작아 보이므로, 미리 키워 놓은 것입니다.
오른손. 유난히 크고 혈관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같은 이유이며, 여기에 힘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더해집니다.
눈. 두 눈은 정확히 같은 방향을 보지 않습니다. 각각의 눈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최적화되도록 조각되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면 어색하고, 옆에서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이 조각은 한 번도 제자리에 서 본 적이 없습니다. 완성되고 보니 6톤짜리 대리석을 성당 지붕까지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세울 것인가
1504년 1월 25일, 피렌체 시민과 예술가 서른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참석자 명단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필리피노 리피, 페루지노,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있었습니다.
후보지는 아홉 곳이었고, 의견은 크게 둘로 갈렸습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이끄는 쪽은 시뇨리아 광장의 로자 데이 란치 지붕 아래를 주장했습니다. 대리석에 결함이 있으니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안을 지지했습니다. 벽에 기대어 뒤에 검은 벽감을 두자는 구체적인 제안까지 나왔습니다.
다른 쪽은 시청사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 입구를 주장했습니다. 이쪽이 이겼습니다.
그 결정으로 이 조각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성당 지붕 위의 예언자가 될 예정이던 작품이, 시 정부 청사 앞에 서서 공화국의 자부심을 표상하는 상징이 된 것입니다. 골리앗을 힘이 아니라 판단과 용기로 이긴 소년은 강대국들 사이에 낀 피렌체의 자화상이 되었습니다.
다만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대기 작가 루카 란두치는 이 조각을 옮기는 동안 밤마다 경비를 세워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돌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감상 포인트
선택된 순간.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다비드는 승리한 뒤의 모습입니다. 발밑에 골리앗의 머리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전을 골랐습니다. 돌은 아직 오른손에 쥐여 있고, 투석기 끈은 왼쪽 어깨에 걸려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의 두 상태.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오른쪽 다리는 느슨하게 둔 콘트라포스토 자세입니다. 그런데 하반신은 편안한 반면 상반신은 긴장해 있습니다. 목의 힘줄이 튀어나오고, 눈썹이 찌푸려져 있으며, 오른손의 혈관이 부풀어 있습니다. 몸의 절반은 쉬고 있고 절반은 이미 싸우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보십시오. 앞서 말한 이유로, 이 조각은 정면 눈높이가 아니라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비례가 맞습니다.
미켈란젤로에 대하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카프레세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자랐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성장했고, 조각과 회화와 건축과 시를 모두 다뤘습니다.
널리 인용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조각은 이미 돌 안에 있었고 자신은 그것을 꺼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이 문장은 후대에 다듬어진 형태이며, 그가 실제로 남긴 것은 소네트의 한 구절입니다. 최고의 예술가라 해도 대리석 한 덩어리가 이미 품고 있지 않은 착상은 가질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방법론이 아니라 시입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이 조각과 함께 전해집니다. 피렌체의 수반이었던 피에로 소데리니가 다비드의 코가 너무 크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가루를 손에 몰래 쥐고 발판에 올라가, 정으로 몇 번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가루를 흘려보냈습니다. 소데리니는 훨씬 나아졌다고 만족했습니다.
대표작으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피에타』가 있습니다. 1564년, 여든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조각이 겪은 일들
1527년. 반메디치 봉기 중에 누군가 팔라초 베키오 창문에서 의자를 던졌고, 다비드의 왼팔이 세 조각으로 부러졌습니다. 154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1873년. 삼백육십여 년의 옥외 노출로 손상이 누적되자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원래 자리에는 1910년 복제품이 세워졌습니다.
2차 대전. 폭격에 대비해 벽돌로 둘러싸 보호했습니다.
1991년. 한 남자가 숨겨 온 망치로 왼발을 내려쳐 발가락이 손상되었습니다.
유산과 영향
이 조각은 이후 서양 조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상적인 인체 비례, 심리적 긴장의 표현, 콘트라포스토의 활용이 모두 여기서 재정의되었습니다. 베르니니와 카노바가 이 계보 위에 있습니다.
오늘날 이 형상은 미술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의 기호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복제품이 서 있고, 광고와 패션과 밈에서 끝없이 인용됩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주소는 Via Ricasoli 58-60이며 두오모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입니다.
- 온라인 사전 예약이 사실상 필수입니다. 현장 대기는 몇 시간에 이를 수 있고, 성수기에는 몇 주 전에 마감됩니다.
- 오전 개관 직후가 가장 한산합니다.
- 큰 가방은 반입이 제한됩니다.
- 개관 시간과 요금은 변동되므로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미술관의 복도에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연작 『노예』가 있습니다. 돌에서 반쯤 빠져나온 인체들입니다. 다비드에 이르기 전에 이쪽을 먼저 지나가게 되어 있는데, 그 배치는 우연이 아닙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들을 통과한 뒤에 완성된 것과 만나는 동선입니다.
시뇨리아 광장의 복제품도 볼 만합니다. 이 조각이 원래 서 있던 자리이며, 무료입니다. 다만 진품은 미술관 안에 있습니다.
이 조각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어긋남입니다. 손이 크고, 머리가 크고, 눈이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조각이 결코 서 보지 못한 자리, 성당 지붕 위 이십오 미터 높이에서 완성되도록 계산된 흔적입니다. 우리는 도달하지 못한 설계도의 결과물을 보고 있습니다.
이미지: David – 미켈란젤로, 1501~1504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