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ghting Temeraire by J. M. W. Turner, 1839

싸우는 테메레르

2005년 BBC 라디오 4 『투데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들은 이 그림을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뽑았다. 후보에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도 있었지만, 10만 명이 넘는 참여자 가운데 3분의 1에 가까운 표가 터너의 낡은 군함에 쏠렸다. 그런데 그 배는 그림 속 모습으로 템스강을 거슬러 오른 적이 없다. 실제 테메레르는 돛대도 삭구도 모두 뜯겨 나간 빈 껍데기였고, 끌고 간 예인선은 한 척이 아니라 두 척이었으며, 해는 그림과 반대편에서 지고 있었다. 터너는 사실을 알면서 바꿨다.

기본 정보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터너는 이 그림을 팔지 않았다. 사겠다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고, 그림을 ‘나의 사랑(his Darling)’이라 불렀다. 일찍부터 국가에 넘길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1851년 세상을 떠난 뒤 터너 유증을 통해 내셔널 갤러리로 들어와 가장 먼저 전시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화가가 이렇게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그림이 다루는 감정에 있다. 1839년 왕립 아카데미에 이 작품을 걸면서 터너는 토머스 캠벨의 시 『영국의 뱃사람들이여』에서 두 행을 손질해 함께 내걸었다. 전투와 바람을 견뎌낸 그 깃발이 더 이상 이 배의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그림 속 테메레르에는 유니언 잭이 없다. 해군의 재산이 아니게 된 순간을 터너는 깃발의 부재로 표현했다. 대신 앞서 가는 예인선의 높은 마스트에는 상선 깃발이 또렷하게 펄럭인다.

존 러스킨은 터너가 가장 짙은 진홍빛 노을을 그릴 때 그것이 죽음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 그림의 오른쪽 3분의 1을 채운 노을은 배의 마지막 정박지를 향한 항해와 정확히 겹친다.

역사적 배경

테메레르는 5,000그루가 넘는 참나무로 지은 98문 3층 갑판 군함이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를 엄호하며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활약으로 ‘싸우는(Fighting) 테메레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이후 영국의 대형 군함 대부분이 쓸모를 잃었고, 테메레르도 1820년부터 시어니스 앞바다에 계류된 채 주로 보급선 역할을 했다.

1838년 6월, 해군성은 배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선령 40년이 넘어 남은 가치가 목재뿐이었기 때문이다. 매각에 앞서 해군은 돛대와 활대를 포함해 재사용 가능한 부품을 모두 떼어냈고, 배는 빈 선체가 되었다. 로더하이드의 해체업자 겸 목재상 존 비트슨이 5,530파운드에 사들였다. 스스로 항해할 수 없는 2,110톤 선체를 옮기기 위해 비트슨은 증기 예인선 두 척을 고용했다. 시어니스에서 로더하이드까지 이틀이 걸렸고, 배는 1838년 9월 6일 마지막 부두에 닿았다.

터너가 이 장면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 영국에 없었을 수도 있다. 그는 신문 보도를 바탕으로 장면을 상상해 재구성했다. 다만 이 배 자체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1806년에 그린 『빅토리호 뒷돛대 우현 삭구에서 본 트라팔가르 해전』(테이트 소장)에 이미 테메레르가 등장한다.

1830년대 영국은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있었고, 증기기관이 범선을 빠르게 밀어내고 있었다. 트라팔가르는 아직 생생한 기억이었다. 영국에서 가장 큰 군함이 해체를 위해 팔려 나가고, 그것도 템스강 상류 깊숙한 곳까지 끌려 올라온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화면 왼편을 차지한 것이 테메레르다. 유령처럼 희고 금빛으로 빛나는 이 선체는 실제와 다르다. 진짜 테메레르는 검정과 노랑으로 칠해져 있었다. 터너는 색을 바꿔 배에 비현실적인 존재감을 입혔다. 돛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이미 뜯겨 나간 세 개의 하부 돛대를 터너는 되돌려 놓았고, 돛은 말아 올린 채 삭구를 일부 남겨두었다. 마지막 항해에서만큼은 배가 배의 모습으로 가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그 앞을 가는 것이 작고 검은 외륜 예인선이다. 실제로는 두 척이 끌었지만 터너는 한 척만 앞세웠다. 나머지 한 척은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더 대담한 개입은 굴뚝의 위치다. 터너는 검은 굴뚝을 마스트 뒤가 아니라 앞으로 옮겼다. 그래야 그을음 섞인 긴 연기가 뒤로 흘러 테메레르의 돛대 사이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에 충실한 관람객들은 곧바로 ‘오류’를 지적했다. 그러나 나중에 어느 판화가가 예인선의 구조를 ‘바로잡아’ 새기자 터너는 크게 화를 냈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다.

오른쪽에서는 해가 진다. 두꺼운 구름이 구릿빛으로 타오르고, 흰 태양의 원반은 오른쪽 아래 어두운 부표와 균형을 이룬다. 태양 아래로는 창백한 돛대의 숲이 아득히 물러난다. 새커리는 이를 두고 사라져 가는 헤아릴 수 없는 함대라고 썼다.

그리고 왼쪽 위 구석에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다. 물 위에도 그 빛이 어른거린다. 터너는 해와 달이 동시에 보이는 순간에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가 겹친다.

다만 이 노을 자체가 터너의 자유로운 각색이다. 테메레르는 오후에 로더하이드에 닿았을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해가 잘못된 방향에서 지고 있다. 템스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는 서쪽을 향하므로 동쪽에 노을을 등질 수 없다. 이 문제는 당시 『더 타임스』 지면에서 제법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터너는 정확성 대신 감정을 택했다.

그래서 이 그림을 증기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야 하는지는 열린 물음으로 남는다. 새커리는 예인선과 그것이 상징하는 것에 비판적인 그림으로 보았다. 그러나 터너 본인의 태도는 더 모호했다. 그는 증기선과 철도를 즐겨 이용했고 그것들을 그리기도 했다. 다섯 해 뒤에 나온 『비, 증기 그리고 속도』는 같은 화가가 기관차를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그린 작품이다.

J. M. W. 터너에 대하여

조지프 맬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는 런던 코번트 가든의 이발사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왕립 아카데미 부속 학교에 들어갔다. 『싸우는 테메레르』를 그렸을 때 그는 이미 왕립 아카데미에서 40년째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고,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빛과 대기, 바다와 날씨를 다루는 능력에서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었다.

후기로 갈수록 그의 화면에서는 형체가 흐려지고 빛과 색만 남는다. 이 때문에 여러 미술사가가 그를 뒤에 올 회화의 선구자로 본다. 다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터너에게 진 빚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보다 복잡하다. 모네는 1870~71년 런던 체류 중에 터너를 보았지만, 그의 낭만주의적 과잉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하는 숭고의 미학이 터너에게서는 바다와 빛의 문제로 옮겨 간다.

유산과 영향

이 그림은 영국인의 집단 기억 안에 자리 잡았다. 2005년 BBC 라디오 4 『투데이』의 여론조사에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뽑혔고, 2016년 잉글랜드 은행은 새 20파운드 지폐에 터너와 이 작품을 싣기로 발표했다. 지폐는 2020년부터 유통되었으며, 그림과 함께 1799년 터너의 자화상, 그의 서명, 그리고 ‘빛은 곧 색이다’라는 문장이 실려 있다.

2012년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는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가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 앞에 앉아 새 병기 담당관 Q(벤 위쇼)를 만난다. Q는 위대한 옛 군함이 볼썽사납게 해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늘 조금 쓸쓸하다며, 시간의 불가피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본드의 대답은 그저 커다란 배 한 척이 보인다는 것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다루는 이 영화의 주제가 그림 한 점에 압축된 장면이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싸우는 테메레르』(소장번호 NG524)는 런던 트래펄가 광장 내셔널 갤러리 40번 전시실에 있다. 같은 방에 『비, 증기 그리고 속도』가 걸려 있어, 사라지는 것과 밀려오는 것을 다룬 터너의 두 그림을 나란히 볼 수 있다. 상설 전시는 무료다. 개관 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금요일은 오후 9시까지지만,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채링 크로스와 레스터 스퀘어다.

평일 개관 직후가 가장 한산하다. 이 그림은 대여 전시에 나가는 일도 있어, 2020~21년에는 테이트 브리튼의 《터너의 근대 세계》에, 2024년에는 뉴캐슬 레잉 아트 갤러리에 출품되었다. 터너의 작품을 더 보고 싶다면 테이트 브리튼으로 가면 된다. 터너 유증에 포함된 방대한 유화와 수채화, 스케치가 그곳에 있다.

그림 앞에 서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터너의 선택인지 구분하는 일이 감상의 일부가 된다. 돛대도, 색도, 예인선의 굴뚝도, 심지어 해가 지는 방향까지 그는 바꾸었다. 남은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기록이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는 장면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어 할 만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화면이다.

이미지: The Fighting Temeraire – J. M. W. Turner (1839).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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