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ue of Liberty by Frédéric Auguste Bartholdi, 1886

자유의 여신상

이 조각상의 발밑에는 끊어진 족쇄가 있습니다. 땅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 내려다볼 때에야 드러납니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낸 프랑스 법학자 에두아르 드 라불레는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이 선물은 미국의 노예제 종식을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습니다. 바르톨디는 초기 모형에서 여신의 왼손에 끊어진 사슬을 들려주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발밑으로 옮기고 손에는 서판을 쥐여주었습니다.

기본 정보

  • 조각: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 (1834~1904)
  • 내부 구조 설계: 귀스타브 에펠
  • 원래 제목: 『세계를 밝히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 제막: 1886년 10월 28일
  • 재료: 철 골조 위에 두께 약 2.4mm의 구리판
  • 높이: 조각상 46m, 받침대와 기초를 포함한 전체 93m
  • 미술 사조: 신고전주의
  • 소재지: 미국 뉴욕항 리버티섬. 국립기념물로 국립공원관리청이 관리합니다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이 조각상은 처음부터 이민의 상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발상은 1865년 무렵 프랑스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아래 있었고, 공화주의자들은 억눌려 있었습니다. 라불레는 미국이 공화정을 지켜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선물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 선물이 프랑스인들에게도 자극이 되기를 조용히 기대했습니다. 동시에 미국에서 막 끝난 노예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민의 상징이 된 것은 나중입니다. 1883년 시인 에마 라자루스가 받침대 건설 기금을 모으기 위해 소네트 『새로운 거상』을 썼습니다.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 자유롭게 숨 쉬기를 갈망하는 무리를 자신에게 보내라는 그 시입니다. 이 시를 새긴 청동판이 받침대 안에 설치된 것은 1903년, 제막으로부터 십칠 년 뒤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의미는 그 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예술과 공학

이 조각상이 특별한 이유 하나는 구조입니다.

구리 외피의 두께는 약 2.4밀리미터입니다. 동전 두 장을 겹친 정도입니다. 그 얇은 껍질이 46미터 높이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내부의 철 골조 덕분이며, 그것을 설계한 사람이 훗날 에펠탑을 세운 귀스타브 에펠입니다.

핵심은 강하게 붙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리판은 골조에 납작한 쇠막대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바람이 불면 조금씩 움직입니다. 단단히 고정했다면 온도 변화와 바람에 구리가 찢어졌을 것입니다. 예술가가 외형을 만들고 공학자가 그것을 버티게 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 왕관의 일곱 갈래. 일곱 바다와 일곱 대륙을 뜻합니다. 자유가 한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 오른손의 횃불. 계몽의 빛입니다. 지금 보이는 횃불은 1986년에 만든 새것이며, 24캐럿 금박을 입혔습니다.
  • 왼손의 서판. 로마 숫자로 JULY IV MDCCLXXVI, 곧 1776년 7월 4일이 새겨져 있습니다.
  • 발밑의 족쇄. 앞서 말한 부분입니다. 지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 색. 처음에는 구릿빛 갈색이었습니다. 이십에서 삼십 년에 걸쳐 산화하면서 오늘날의 청록색이 되었습니다. 이 녹청은 손상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그 아래 구리를 보호하는 층입니다.

1916년 이후 닫힌 곳

1916년 7월 30일 새벽, 독일 요원들이 인근 블랙톰섬에 쌓여 있던 약 이백만 파운드의 탄약을 폭파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로 향할 보급품을 막기 위한 공작이었습니다.

폭발의 규모는 규모 5.5의 지진에 맞먹었고 필라델피아에서도 감지되었습니다. 파편이 조각상의 구리 표면에 박혔고, 충격파가 횃불 팔을 밀어 내부 구조를 손상시켰습니다.

그날 이후 횃불은 한 번도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관람객이 횃불 안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은 왕관이며, 그곳까지 354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대신 1986년 교체 작업으로 내려온 원래의 횃불은 리버티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백 년 동안 뉴욕항 위에 서 있던 물건을 손이 닿는 거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르톨디에 대하여

바르톨디는 1834년 프랑스 알자스의 콜마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집트를 여행하며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본 경험이 그에게 기념비적 규모에 대한 감각을 남겼습니다.

그는 실제로 수에즈 운하 입구에 세울 거대한 여인상을 구상한 적이 있습니다. 등불을 든 이집트 여인이 아시아에 빛을 가져오는 형상이었고, 이집트 총독에게 거절당했습니다. 그 구상이 뉴욕에서 다른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지만, 바르톨디 본인은 두 계획의 연결을 부인했습니다.

기금은 양쪽에서 따로 모았습니다. 조각상은 프랑스 시민들의 모금으로, 받침대는 미국 시민들의 기부로 지어졌습니다. 미국 쪽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신문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가 자신의 신문을 통해 캠페인을 벌였고, 십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해 목표액을 채웠습니다. 대부분 소액 기부였습니다.

바르톨디는 1904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산과 영향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등재는 마침 백주년을 앞둔 대규모 복원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형상은 영화와 광고, 만화, 설치미술에서 끝없이 인용됩니다. 팝아트는 그것을 소비문화 비판의 도구로 썼고, 재난 영화는 반복해서 그것을 부숩니다. 파리 센강에도 축소 복제본이 서 있습니다.

동시대 기념 조각의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은 고대의 거상 전통을 산업 기술로 재현한 사례입니다.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본 바르톨디가 사십 미터가 넘는 인물상을 구리판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경로를 생각하면, 이 조각상은 고대와 19세기 공학이 만난 지점에 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뉴욕항 리버티섬에 있습니다. 맨해튼의 배터리 파크 또는 뉴저지의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에서 페리로 갑니다. 페리 운항사는 지정되어 있으므로 공식 경로로 예약하시기 바랍니다.

  • 왕관 입장권은 별도이며 수량이 매우 적습니다. 성수기에는 몇 달 전에 마감됩니다. 계단은 354개이고 좁은 나선형 구간이 이어지므로 체력과 폐소공포 여부를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 받침대 전망대는 왕관보다 표를 구하기 쉽고, 엘리베이터도 있습니다.
  • 횃불에는 올라갈 수 없습니다. 대신 박물관에서 원래 횃불의 실물을 볼 수 있습니다.
  • 이른 첫 페리가 가장 한산합니다.
  • 같은 티켓으로 엘리스섬의 이민 박물관에 갈 수 있습니다. 라자루스의 시가 만든 의미를 이해하려면 오히려 이쪽이 본편입니다.

이 조각상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시차입니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이 노예제의 종식을 기념하려고 보낸 선물이, 십칠 년 뒤 벽에 붙은 시 한 편 때문에 이민자를 맞이하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만든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은 의미가 그 위에 얹혔고, 지금은 그 의미가 원래의 것보다 강합니다.

이미지: Statue of Liberty – Frédéric Auguste Bartholdi, 1886년.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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