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ude Maja by Francisco Goya, 1800

나체의 마하

이 그림은 다른 그림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도이의 저택에는 누드화만 모아 둔 방이 있었고, 그 방에는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가 걸려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비너스의 등을 보여주고 얼굴은 거울에만 비쳤습니다. 고야는 정면을 그렸습니다. 거울도, 큐피드도, 신화도 없앴습니다. 남은 것은 침대에 누워 관람자를 마주 보는 사람 한 명입니다.

기본 정보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에서 누워 있는 여성 누드는 대개 비너스였습니다. 신화라는 명분이 있었고, 그 명분 덕분에 그림은 예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대개 잠들어 있거나 시선을 비껴두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명분이 없습니다. 여신도 아니고, 알레고리도 아니고,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한 여성이 침대에 누워 화면 밖을 똑바로 봅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유혹하지도 않는 표정입니다. 관람자를 마주 보되 관람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얼굴입니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서양 회화에서 여성의 음모를 부정적인 함의 없이 묘사한 가장 이른 예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그전에도 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매춘부를 그린 그림처럼 도덕적 판단이 붙은 맥락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이것은 완전히 세속적인 그림이었고, 바로 그 점이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역사적 배경

1790년대 말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흔들리고 있었고, 실권은 총리 마누엘 고도이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드화만 따로 모아 둔 개인 방을 가지고 있었고, 이 그림은 그 방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방에는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있었습니다. 지금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작품입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고야가 무엇을 했는지 분명해집니다.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등을 보이고 누워 있고 얼굴은 큐피드가 든 거울에만 나타납니다. 몸은 길고 유려하며, 화려한 새틴 위에 놓여 있습니다. 고야의 마하는 정면을 향해 눕고, 몸은 짧고 각이 져 있으며, 아무 장식 없는 흰 천 위에 있습니다. 거울도 큐피드도 없습니다. 고야는 벨라스케스를 평생의 스승으로 꼽았지만, 여기서는 스승의 구성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같은 자세의 『옷을 입은 마하』가 더해집니다. 두 그림은 동시에 그려진 것이 아닙니다. 누드가 먼저였고, 옷 입은 쪽은 1808년 재산 목록에 처음 등장합니다. 고도이의 집에서 옷 입은 쪽이 앞에 걸리고, 도르래 장치로 밀어내면 뒤에서 이 그림이 나타나는 구조였다고 전해집니다.

종교재판소

1808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고도이가 몰락하면서 그의 재산이 압수됩니다. 1813년 페르난도 7세의 몰수 목록에서 두 마하는 ‘벗은 집시’와 ‘옷 입은 집시’로 기재되었고, 같은 해 종교재판소가 두 작품을 음란물로 판단해 압수합니다.

1815년 3월 16일, 종교재판소는 고야에게 출두 명령을 내립니다. 이 그림들이 그의 작품인지, 누가 의뢰했는지, 어떤 의도였는지 밝히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는 5월에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답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각한 처벌은 받지 않았고, 일부 기록은 루이스 마리아 데 보르본 추기경의 도움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다만 이는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고야가 종교재판소에 불려간 것은 이때가 두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1799년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두 그림은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의 닫힌 방에 보관되었습니다. 왕실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상 격리된 것입니다. 1901년에야 프라도로 옮겨져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고야가 죽고 73년 뒤의 일입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시선.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요소는 그다음입니다.

피부. 고야는 따뜻한 크림빛과 장밋빛을 섞어 살을 표현했습니다. 아래 깔린 흰 천이 차갑게 처리되어 있어 대비가 강해집니다.

구도. 인물이 화면을 거의 가로지릅니다.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려 몸을 활짝 열었고, 몸은 완만한 곡선을 그립니다. 다만 벨라스케스의 유려한 곡선과 달리 이 몸은 짧고 각이 져 있습니다. 이상화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 얼굴이 몸에 비해 어색하게 얹혀 있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작업 도중 머리를 다시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이는 모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과 연결됩니다.

두 그림의 미세한 차이. 프라도에서 옷 입은 버전과 나란히 볼 때 자세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같아 보이지만 다리 위치와 몸의 각도가 조금씩 다릅니다. 프라도의 설명에 따르면 이 누드 쪽이 톤의 계조와 투명도에서 더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모델은 누구인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설은 알바 공작부인 마리아 카예타나 데 실바입니다. 고야와의 관계에 관한 소문, 1797년 초상화의 반지와 ‘오직 고야’라는 글자가 근거로 인용됩니다. 다른 설은 고도이의 연인 페피타 투도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전자를 ‘전설’로 표현하고 후자에 대해서도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고 봅니다.

1945년에는 알바 공작부인의 유해를 발굴해 신체 비율을 대조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인물의 특징을 조합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견해도 폭넓게 받아들여집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에 대하여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1770년경 자비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로마와 파르마를 거쳤고, 돌아와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의 밑그림을 그리며 궁정에 진입했습니다.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1792년경 중병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 그의 작업은 방향을 바꿉니다. 『로스 카프리초스』, 『전쟁의 참화』, 그리고 만년에 자기 집 벽에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이 그 결과입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셋이라고 말했습니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자연입니다. 『라스 메니나스』를 남긴 그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유산과 영향

가장 직접적인 후예는 마네입니다. 1863년에 그려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의 원천으로, 오르세 미술관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함께 고야의 이 작품을 명시합니다. 신화의 명분 없이 누운 여성이 관람자를 마주 보는 구성이 그 계보의 핵심입니다.

이 그림의 소란은 20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1930년 6월 15일, 스페인 우정 당국은 고야 서거를 기념하는 우표 세트를 발행하면서 세 종에 이 그림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이 우표가 붙은 우편물을 모두 발송인에게 반송했습니다. 압수당한 지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이 그림은 여전히 국경에서 걸렸습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여성의 주체성과 예술의 자유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인용됩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어둘 만합니다. 이 그림은 여성의 자유를 위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남성 권력자의 사적인 방에, 이름도 남기지 않은 모델을 그려 걸어 둔 것입니다. 그 사실과 이 그림이 이후 미술에서 한 역할은 함께 놓고 보아야 합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있습니다. 대개 옷 입은 버전과 나란히 걸려 있고, 두 점을 함께 보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프라도는 월요일에도 문을 엽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과 공휴일 모두 개관하며 요일에 따라 폐관 시각이 다릅니다. 하루 중 마지막 두 시간가량은 무료 입장 시간대이지만 그만큼 붐빕니다. 여유 있게 보려면 오전 개관 직후를 권합니다. 개관 시간, 요금, 전시실 배치는 변동이 있으므로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미술관에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8년 5월 3일』, 『검은 그림』 연작이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는 프라도, 티센보르네미사, 레이나 소피아가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 하루에 묶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세 곳을 하루에 다 보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출발점을 보고 싶다면 런던으로 가셔야 합니다. 고도이의 방에 함께 걸려 있던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는 지금 내셔널 갤러리에 있습니다. 한때 한 방에 있던 두 그림은 이제 두 나라에 나뉘어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벗은 몸이 아니라 눈입니다. 그림은 백 년 가까이 닫힌 방에 있었고, 우표가 되어 국경에서 반송당했고, 화가는 종교재판소에 불려 갔습니다. 그 모든 소동의 원인은 결국 화면 밖을 마주 본 시선 하나였습니다.

이미지: The Nude Maja (La maja desnuda) – Francisco Goya, 1797~1800년경, 프라도 미술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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