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이
모아이에 관해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라파 누이 사람들이 석상을 만드느라 섬의 자원을 고갈시켜 스스로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2024년 『네이처』에 실린 유전체 연구는 1670년부터 1950년 사이에 살았던 열다섯 명의 유해를 분석했고, 인구 붕괴의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인구는 13세기부터 유럽인이 도착할 때까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기본 정보
- 제작: 라파 누이 사람들 (개별 제작자는 전하지 않습니다)
- 제작 시기: 주로 1250~1500년
- 재료: 주로 라노 라라쿠 화산의 응회암. 일부는 현무암과 붉은 스코리아
- 수량: 887점 (조사 기준). 그중 약 절반이 채석장에 남아 있습니다
- 크기: 평균 높이 약 4m, 무게 약 12.5톤. 미완성 최대작은 약 21m
- 미술 사조: 라파 누이 미술
- 소재지: 칠레령 라파 누이(이스터섬). 섬 전체가 라파 누이 국립공원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가장 널리 퍼진 오해
이 이야기를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라파 누이가 자멸했다는 서사는 오랫동안 환경 파괴의 교훈적 사례로 인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근거가 무너졌습니다.
첫째, 유전학입니다. 2024년 연구진은 파리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라파 누이 사람 열다섯 명의 유해에서 유전체를 복원했습니다. 17세기에 인구가 급감했다면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든 흔적, 이른바 병목이 나타나야 합니다.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구는 13세기부터 18세기 유럽인 도착 때까지 안정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둘째, 인구 규모입니다. 자멸 이론은 이 작은 섬에 만오천에서 삼만 명이 살았다고 전제했습니다. 2024년 섬의 돌밭 경작지를 다시 측정한 연구는 그 면적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결과를 내놓았고, 부양 가능한 인구를 약 삼천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셋째, 숲입니다. 야자나무가 사라진 데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첫 정착민이 배에 싣고 온 폴리네시아쥐가 큰 몫을 했습니다. 쥐들이 야자 씨앗을 먹어 재생을 막았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1862년에서 1863년 사이 몇 달 동안 페루의 노예 상인들이 라파 누이 사람 약 1,500명을 납치해 플랜테이션과 구아노 광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섬 인구의 삼분의 일가량이었습니다. 이어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붕괴는 있었지만, 그것은 자초한 것이 아니라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모아이의 얼굴은 조상입니다. 신이 아니라 특정 씨족의 죽은 지도자들이며, 그들의 영적 힘인 마나가 석상에 깃들어 살아 있는 후손을 지킨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후 위의 모아이는 바다가 아니라 섬 안쪽을 봅니다. 마을을 향해, 지켜야 할 사람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바다를 등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조각의 목적을 말해 줍니다.
비례도 의도적입니다. 머리가 전체의 약 8분의 3을 차지합니다. 라파 누이 문화에서 머리는 마나가 머무는 자리였습니다. 몸통은 있지만 다리는 없습니다. 손은 몸통 앞에 길게 붙어 있고 손가락 끝이 배 위에서 만납니다.
감상 포인트
눈은 원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텅 빈 눈구멍은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1978년 소니아 하오아가 흰 산호로 만든 완전한 눈을 발굴했습니다. 붉은 스코리아나 흑요석으로 눈동자를 만들어 산호 안에 끼운 형태였습니다. 눈은 석상을 채석장에서 옮겨 아후에 세운 뒤에야 넣었습니다. 그 순간이 석상이 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푸카오. 일부 모아이의 머리 위에는 붉은 원통형 덩어리가 얹혀 있습니다. 푸카오라고 부르며, 푸나 파우라는 별도의 채석장에서 붉은 스코리아를 깎아 만들었습니다. 모자로 보기도 하고 상투처럼 묶은 머리로 보기도 합니다. 무게가 수 톤에 이르는 것을 어떻게 올렸는지도 논쟁거리입니다.
등의 문양. 발굴된 모아이의 등에는 정교한 선각 문양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조각들이 머리만 있는 줄 알았던 이유는 몸통이 흙에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반 방법.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통나무 썰매설이 오래되었지만, 2012년 테리 헌트와 칼 리포는 밧줄 세 가닥으로 복제 석상을 좌우로 흔들어 ‘걷게’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열여덟 명이 4톤이 넘는 석상을 사십 분에 백 미터 옮겼습니다. 모아이의 D자형 바닥과 앞으로 기운 무게중심이 이 방식에 유리하다는 점도 지적됩니다. 라파 누이의 구전에는 모아이가 스스로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라파 누이는 사람이 사는 곳 가운데 가장 고립된 땅입니다. 가장 가까운 유인도까지 1,900킬로미터, 남아메리카까지 3,700킬로미터입니다.
모아이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1250년에서 1500년 사이,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라파 누이는 그 모든 것과 완전히 단절된 채 독자적인 조각 전통을 세웠습니다.
다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2024년 유전체 연구는 라파 누이 사람들이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혈통이 섞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콜럼버스보다 이른 시기의 태평양 횡단 접촉을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모아이가 쓰러진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7~18세기 씨족 간 분쟁 과정에서 상대 씨족의 조상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입니다. 1960년 칠레 앞바다에서 관측 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고, 그 쓰나미가 아후 통가리키의 열다섯 개 모아이를 통째로 쓸어 내륙으로 던졌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열다섯 개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복원한 것이며, 일본 기업 타다노가 기증한 크레인이 쓰였습니다.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
개별 조각가의 이름은 전하지 않습니다. 모아이는 공동체 전체의 신앙과 노동이 결집된 결과물이었습니다.
라파 누이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온 이들의 후예이며, 롱고롱고라는 독자적인 기호 체계를 남겼습니다. 아직 해독되지 않았고, 그것이 완전한 문자 체계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습니다.
유산과 영향
모아이의 실루엣은 오늘날 ‘고대의 신비’를 뜻하는 가장 강력한 기호 중 하나이며, 이모지(🗿)로도 전 세계에서 쓰입니다.
동시에 문화재 반환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대영박물관의 호아 하카나나이아는 1868년 영국 군함 승무원들이 가져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친 것입니다. 라파 누이 대표단은 2018년 런던을 방문해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협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위협이 있습니다. 2025년 발표된 모델링은 해수면 상승에 따른 파도가 2080년 무렵 아후 통가리키를 비롯한 오십여 개 유적을 침수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자원 고갈로 자멸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기후 변화라는 실제 위협은 지금 진행 중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칠레령 라파 누이에 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항공편으로 다섯 시간 반가량 걸리며, 섬의 유일한 도시 항가 로아가 거점입니다.
- 라노 라라쿠 채석장. 미완성 모아이 수백 개가 제작 도중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바위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어 제작 공정을 순서대로 볼 수 있습니다.
- 아후 통가리키. 열다섯 개가 일렬로 선 최대 규모의 아후입니다. 일출 방향과 맞아떨어져 새벽에 인기가 많습니다.
- 아후 아키비. 바다를 향한 것처럼 보이는 일곱 개의 모아이가 있습니다. 다만 이곳은 섬 안쪽에 있어서, 자기 마을을 바라보다 보니 결과적으로 바다 쪽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규칙의 예외가 아닙니다.
- 푸나 파우. 붉은 푸카오를 깎아낸 채석장입니다. 다녀오는 사람이 적습니다.
섬 전체가 국립공원이므로 입장권이 필요하며, 상당수 유적은 가이드 동반이 의무입니다. 체류 기간과 숙소 사전 예약에 관한 규정도 있으므로 출발 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건기인 11월부터 3월이 방문에 좋습니다.
가이드에 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라파 누이 출신 가이드를 고르시기를 권합니다. 이 섬의 역사는 오랫동안 바깥 사람들이 대신 이야기해 왔고, 그중 상당 부분이 방금 정리한 것처럼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석상들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신비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입니다. 그들은 바다를 등지고 서 있습니다. 먼 곳을 보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을 지키라고 세운 것입니다.
이미지: Moai, 라파 누이(이스터섬), 라노 라라쿠.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