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 이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풍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삼십 년 동안 엘베 사암산맥을 걸어 다니며 현장에서 스케치를 모았고, 드레스덴의 작업실에서 그것들을 조합해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는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이 화면 각 부분이 어느 스케치에서 왔는지까지 짚어냅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774~1840)
- 제작 시기: 1818년경, 드레스덴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94.8 × 74.8 cm
- 미술 사조: 낭만주의
- 소장처: 함부르거 쿤스트할레, 함부르크 (1970년 입수)
조립된 풍경
프리드리히의 작업 방식은 두 단계였습니다. 먼저 야외에서 정밀한 연필 스케치를 그립니다. 그다음 작업실로 돌아와, 시기와 장소가 다른 스케치들을 하나의 화면으로 조립합니다. 그림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는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확인된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인물이 딛고 선 바위 — 1813년 6월 3일, 작센 스위스의 카이저크로네에 올라 그린 스케치입니다. 날짜까지 남아 있습니다.
- 왼쪽 배경의 원뿔형 산 — 1808년 5월 보헤미아 스위스의 로젠베르크를 그린 습작입니다.
- 왼쪽 중경의 바위 무리 — 1808년, 라텐 동쪽 감리크를 그린 그림을 조금 변형한 것입니다.
- 오른쪽 멀리 솟은 수직 기둥 — 체코와 독일 국경에 있는 탁상형 산 치르켈슈타인입니다.
프리드리히 자신의 말이 이 방식을 설명합니다. 화가는 눈앞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보는 것도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면 이 그림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순간을 목격한 기록이 아니라, 여러 시간과 장소를 겹쳐 만든 구성물입니다. 그림 속 남자가 바라보는 것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라 화가가 지은 풍경입니다.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화면 중앙의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미술사에서는 이런 인물을 뤼켄피구어(Rückenfigur)라고 부릅니다. 프리드리히가 반복해서 쓴 장치이며, 일회적인 착상이 아니라 그의 방법입니다.
효과는 분명합니다. 표정을 볼 수 없으므로 감정을 읽을 수 없고, 대신 관람자가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곳을 봅니다.
이 그림이 다루는 감각을 미학에서는 숭고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이라면, 숭고는 압도됨입니다. 대상이 너무 크고 너무 무한해서 파악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감정이며, 두려움과 고양이 섞여 있습니다.
인물은 누구인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후보는 프리드리히 고트하르트 폰 브링켄이라는 작센 보병 장교입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사했으며, 인물이 입은 짙은 초록색 외투를 당시 의용병 부대의 군복으로 보는 견해에 근거합니다. 이 해석을 따르면 이 그림은 풍경화가 아니라 추모화가 됩니다.
프리드리히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붉은 기 도는 머리색이 근거로 제시됩니다.
어느 쪽도 증명되지 않았고, 인물의 익명성은 이 그림이 작동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감상 포인트
복장. 짙은 초록 외투, 어두운 바지, 무릎까지 오는 부츠, 오른손의 지팡이. 산책이 아니라 산행 차림입니다.
안개. 골짜기를 채운 흰 안개가 물처럼 보이기 때문에 ‘안개 바다’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작센 스위스 지역에서 늦가을 새벽에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대기 원근. 전경의 바위는 어둡고 선명하며, 멀어질수록 희뿌옇게 흐려집니다. 거리감을 색의 밀도로 만들었습니다.
광원의 부재. 하늘은 밝지만 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확산된 빛이 시간대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듭니다.
크기. 실물은 A2 용지보다 조금 큰 정도입니다. 이 그림이 담고 있는 공간감을 생각하면 의외로 작습니다. 벽을 압도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에 대하여
프리드리히(1774~1840)는 발트해 연안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세 살 때 얼음이 깨져 물에 빠졌고, 형 요한 크리스토퍼가 그를 끌어낸 뒤 자신은 익사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작업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1800년 무렵 드레스덴으로 옮긴 뒤 주변 지역을 걸어서 답사하며 스케치를 모았습니다. 그에게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이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
그의 사후 명성은 무너졌고 1906년 베를린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재발견되기까지 거의 잊혀 있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복권되었습니다.
유산과 영향
이 그림이 오늘날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1939년 이전의 소장 경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해 베를린 빌헬름 아우구스트 루츠 화랑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함부르거 쿤스트할레가 사들인 것은 1970년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이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퍼졌습니다. 철학서와 역사서의 표지, 음반 재킷, 광고, 영화 포스터에 반복해서 쓰였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책 표지에 오른 그림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물을 뒤에서 보여주며 광활한 풍경 앞에 세우는 구도는 이제 하나의 시각적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의 다른 낭만주의 화가들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보입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역사적 사건과 군중을 다뤘다면, 프리드리히는 한 사람과 침묵을 다뤘습니다. 터너의 『싸우는 테메레르』와는 오히려 가깝습니다. 두 화가 모두 자연을 인간보다 크게 그렸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독일 함부르크의 함부르거 쿤스트할레에 있습니다.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도보 오 분 거리입니다.
이 미술관은 프리드리히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그림 한 점만 보고 나오기에는 아까운 곳이며, 19세기 독일 회화를 통해 낭만주의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개관 시간과 요금은 변동되므로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대여 전시에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2024년 프리드리히 탄생 250주년을 전후해 여러 도시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이어졌습니다. 이 그림을 목표로 함부르크에 가신다면 현재 소재를 미리 확인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덧붙이자면, 그림 속 장소들은 실제로 갈 수 있습니다. 드레스덴 남동쪽 작센 스위스 국립공원에 카이저크로네, 감리크, 치르켈슈타인이 모두 있습니다. 다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이 그림과 같은 광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각각의 조각은 실재하지만 전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고독이 아니라 조립입니다. 우리가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진실한 순간이라고 믿는 이 장면은, 사실 여러 해에 걸쳐 모은 스케치를 작업실에서 이어 붙인 것입니다. 프리드리히가 그린 것은 그가 본 풍경이 아니라, 그런 순간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그의 답입니다.
이미지: 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1818년경, 함부르거 쿤스트할레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