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러의 어머니
이 그림의 이름은 화가가 진 싸움의 흔적입니다. 휘슬러가 붙인 제목은 『회색과 검정의 배치』였습니다. 그런데 왕립 아카데미는 초상화를 ‘배치’라는 이름으로 거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가의 어머니 초상』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이 그림을 ‘휘슬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덧붙임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끝까지 거부한 호칭이 그 그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 (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
- 원제: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 (회색과 검정의 배치 1번)
- 제작 연도: 1871년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144.3 × 162.4 cm (세로보다 가로가 깁니다)
- 미술 사조: 사실주의로 분류되지만, 휘슬러 본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운 유미주의자였습니다
- 소장처: 오르세 미술관, 파리 (1891년 프랑스 국가 구입)
제목을 둘러싼 싸움
휘슬러는 그림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회화가 음악처럼 순수한 감각의 구성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자기 작품에 ‘배치’, ‘녹턴’, ‘심포니’ 같은 음악 용어를 붙였습니다.
1872년 왕립 아카데미 심사위원회는 이 그림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었던 윌리엄 박솔이 반발합니다. 자기가 속한 위원회가 이 작품을 거부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걸지 않으면 위원회에서 사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림은 걸렸습니다. 다만 출입문 위쪽 높은 자리였습니다. 휘슬러는 이후 아카데미에 다시는 작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제목에 설명을 붙였습니다. 『화가의 어머니 초상』입니다. 초상화를 초상화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빅토리아 시대 관객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번호도 나중에 생겼습니다. 이 그림을 본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비슷한 구성으로 앉겠다고 나섰고, 그 작품이 『회색과 검정의 배치 2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이 자동으로 1번이 되었습니다.
휘슬러는 1890년 자기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어머니 그림을 예로 들자면, 그것은 왕립 아카데미에 ‘회색과 검정의 배치’로 걸렸고 실제로 그런 그림이라고. 자신에게는 어머니의 그림이라는 점이 흥미롭지만, 대중이 초상의 신원에 대해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화려한 색도 극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검정, 회색, 흰색이 화면을 지배합니다. 그런데도 시선이 붙듭니다.
이유는 구조에 있습니다. 커튼의 수직선, 벽에 걸린 액자의 수평선, 발판의 수평선이 화면을 격자처럼 나눕니다. 그 격자 안에 인물이 옆모습으로 놓입니다. 감정을 표정으로 전달하지 않고 배치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이 초상화이면서 동시에 거의 추상적인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브리태니커는 이 작품이 기하학적 추상을 반세기쯤 앞질렀다고 평가합니다. 인물을 지우지 않고도 그렇게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가로로 긴 화면. 초상화는 대개 세로가 깁니다. 이 그림은 반대입니다. 그래서 인물 오른쪽에 넓은 빈 벽이 생기고, 그 빈 공간이 화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합니다.
벽의 판화. 인물 뒤에 걸린 작은 작품은 휘슬러 자신의 에칭 『블랙 라이언 워프』입니다. 템스강 연작 중 하나입니다. 자기 그림 속에 자기 그림을 걸어 놓았습니다.
커튼. 왼쪽의 커튼에는 옅은 점무늬가 있습니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무늬가 있는 부분이며, 단조로움이 지루해지지 않도록 잡아 줍니다.
손과 반지. 무릎 위에 포갠 두 손에 결혼반지가 보입니다. 애나 맥닐 휘슬러는 마흔다섯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액자. 액자는 휘슬러가 직접 디자인한 것입니다. 그에게 액자는 작품의 일부였습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에 대하여
휘슬러는 183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났지만 예술 활동은 파리와 런던에서 했습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배운 평면적 구성과 서양 회화를 결합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애나 맥닐 휘슬러는 1864년 런던으로 건너와 첼시의 체인 워크에서 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오면서 휘슬러는 함께 살던 연인을 내보내야 했습니다.
휘슬러는 싸움이 잦은 사람이었습니다. 1878년 존 러스킨과의 명예훼손 소송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배상금은 4분의 1페니였고, 소송 비용으로 파산했습니다. 그 여파로 이 그림을 전당포에 맡긴 적도 있습니다. 오늘날 아이콘이 된 작품이 한때 빚의 담보였습니다.
유산과 소장의 역사
이 그림의 평가를 바꾼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1891년 11월 30일, 프랑스 정부가 4,000프랑에 이 작품을 사들였습니다. 낮은 금액이었고, 휘슬러가 그 값에 동의한 이유는 작품이 뤽상부르 미술관에 들어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 구입을 밀어붙인 사람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와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였습니다. 말라르메는 휘슬러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물론 루브르로 가야지요, 뤽상부르는 그 대기실일 뿐입니다.
그의 말은 맞았지만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림은 1891년 12월 뤽상부르에, 1922년 죄드폼에, 1926년 루브르에, 그리고 1986년 오르세로 옮겨졌습니다.
같은 시기 같은 미술관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해 앞선 1890년, 클로드 모네가 모금을 조직해 마네의 『올랭피아』를 사서 국가에 기증했고, 그 그림도 뤽상부르를 거쳐 오르세에 왔습니다. 두 작품 모두 화가와 문인들이 나서서 국가를 움직인 결과입니다.
미국에서 이 그림은 다른 경로로 유명해졌습니다. 1934년 어머니날 기념 우표에 실렸고, 그 뒤 모성의 상징으로 굳어졌습니다. 앤디 워홀이 다시 그렸고, 1997년 영화 『미스터 빈』에서는 이 작품이 소동의 중심에 놓였습니다. 화가가 초상화로 읽히기를 거부한 그림이 결국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 그림이 되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습니다. 센강 좌안, 옛 기차역을 개조한 건물입니다.
휴관일은 월요일입니다. 목요일은 야간 개장을 합니다. 온라인 사전 예약을 권하며, 성수기에는 사실상 필수입니다. 요금과 무료 개방일은 변동이 있으므로 방문 전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전시실 배치는 조정되므로 특정 작품을 목표로 하신다면 현재 위치를 함께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 그림은 대여 전시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미술관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 그리고 모네와 드가와 르누아르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거리입니다. 어머니는 화면 밖을 보지 않고, 관람자를 향하지도 않습니다. 아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고, 회색과 검정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백오십 년 동안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이미지: Arrangement in Grey and Black No. 1 (Whistler’s Mother) – James McNeill Whistler, 1871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