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따르는 여인
2022년, 이 그림의 표면 아래에서 두 개의 물건이 발견되었습니다. 여인의 머리 뒤 벽에는 도자기 주전자를 걸어두는 나무 선반이 있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버들가지로 엮은 화로 바구니가 있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둘 다 지웠습니다. 그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 목록에는 그 두 물건이 실제로 그의 집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부엌을 그린 다음, 그 부엌을 비웠습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 1632~1675)
- 제작 연도: 약 1660년 (1657~5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기법: 캔버스에 유채
- 크기: 세로 45.5 × 가로 41 cm (세로가 긴 화면입니다)
- 미술 사조: 네덜란드 황금시대
- 소장처: 레이크스뮤지엄, 암스테르담 (1908년 입수)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이 그림의 힘은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없느냐에서 나옵니다.
여인 뒤의 벽은 거의 비어 있습니다. 못 하나와 못이 남긴 구멍 몇 개, 그리고 벽의 얼룩뿐입니다. 그 비어 있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그녀의 손과 우유 줄기에 붙들립니다. 그런데 원래 그 벽에는 주전자 선반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그것을 지웠습니다.
그가 지운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화로 바구니가 있었고, 그 위에 지금의 스토프와 델프트 타일과 바닥이 덮여 있습니다. 두 번의 삭제로 이 부엌은 일상의 잡동사니를 잃고 하나의 동작만 남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그녀는 우리를 보지 않습니다. 눈은 우유가 떨어지는 지점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시선은 관람자를 향하지 않고 노동을 향합니다. 이것이 이 작은 화면이 주는 이상한 존엄의 근거입니다.
역사적 배경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그림을 사는 사람은 왕족이 아니라 상인과 시민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신화가 아니라 자기 집과 자기 도시였습니다. 실내 풍속화가 하나의 산업이 된 이유입니다.
얀 스테인이나 피터르 더 호흐도 실내를 그렸지만 접근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화면에는 이야기가 있고 사건이 있습니다. 페르메이르의 화면에는 사건이 없습니다. 우유가 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녀는 당시 풍속화에서 자주 다뤄진 소재였고, 종종 유혹이나 성적 암시의 대상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벽 아래 걸레받이의 타일 중 하나에는 큐피드가 그려져 있고, 바닥에 놓인 발 스토프는 당시 도상에서 온기를 필요로 하는 여성, 곧 연인을 기다리는 여성의 표지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다만 페르메이르는 그 암시를 화면의 중심에 놓지 않았습니다. 중심에 있는 것은 노동입니다.
2022년의 발견
레이크스뮤지엄은 2023년 대규모 페르메이르 전시를 준비하면서, 마우리츠하위스 연구진과 함께 이 그림을 최신 장비로 조사했습니다. 야경 복원 프로젝트에서 쓰인 매크로 XRF와 반사 이미징 기술이 동원되었습니다.
결과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앞서 말한 주전자 선반과 화로 바구니가 밑그림 단계에 존재했고 나중에 덮였다는 사실입니다. 화로 바구니는 갓난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기저귀를 말리는 데 쓰던 물건입니다. 아이가 많았던 페르메이르의 집에 있던 것이기도 합니다.
둘째, 더 중요한 발견입니다. 검은 물감으로 그린 밑그림 자체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동안 페르메이르는 밑그림 없이 천천히, 한 층씩 쌓아 올리며 작업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현존작이 서른다섯 점밖에 안 되는 이유도 그 느린 속도로 설명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밑그림이 있었다면,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작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미술관 관장은 이 그림만큼 많이 연구된 작품에서 이렇게 명확한 것이 새로 나올 줄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빛. 광원은 왼쪽 창 하나입니다. 그 빛이 벽을 타고 들어와 이마, 팔, 우유 줄기, 빵 껍질 순서로 떨어집니다. 창유리 한 장이 깨져 있다는 점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랑과 파랑. 상의의 노랑과 앞치마의 파랑은 페르메이르가 반복해서 쓴 조합입니다. 파랑은 당시 가장 비싼 안료였던 청금석에서 나온 울트라마린인데, 그는 하녀의 앞치마에 그것을 썼습니다.
빵. 빵 껍질을 가까이서 보면 볼록하게 얹힌 작은 흰 점들이 있습니다. 푸앵티예라고 부르는 이 기법은 『델프트 풍경』의 배와 성벽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초기 렌즈가 만드는 착란원과 닮아,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썼다는 근거로 인용됩니다.
벽의 못. 여인 뒤 벽에 못 하나가 박혀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예전에 무언가 걸려 있던 못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그리면서 페르메이르는 그 벽의 이력까지 그렸습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에 대하여
페르메이르(1632~1675)는 델프트에서 태어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현존작은 서른다섯 점 안팎이고, 대부분 창가에 선 인물이 있는 작은 실내 장면입니다. 야외를 다룬 것은 두 점뿐입니다.
그는 생전에 지역을 벗어난 명성을 얻지 못했고, 마흔셋에 빚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의 작품 상당수는 델프트의 후원자 피터르 판 라위번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페르메이르라는 이름은 사실상 잊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비평가 테오필 토레뷔르거가 그를 미술사에 되돌려 놓은 것은 1860년대의 일입니다. 그 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르메이르가 쓰는 색, 곧 레몬빛 노랑과 옅은 파랑과 진줏빛 회색의 조합에 감탄을 적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페르메이르의 위상은 백오십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유산과 소장의 역사
이 그림은 아마도 판 라위번이 페르메이르에게서 직접 샀을 것입니다. 1696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디시위스 경매에서 175길더에 팔렸는데, 같은 경매에 나온 스물한 점의 페르메이르 가운데 『델프트 풍경』 다음으로 높은 값이었습니다.
1908년, 이 작품이 해외로 팔려 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레이크스뮤지엄이 식스 가문 상속인들로부터 사들였습니다. 렘브란트 협회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국외 유출을 막기 위한 공적 개입이라는 점에서, 프랑스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지켜낸 방식과 닮았습니다.
오늘날 이 그림은 일상을 다루는 모든 회화의 기준점처럼 인용됩니다. 광고와 패션, 영화가 이 구도를 반복해서 빌려 씁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페르메이르의 삶을 허구로 다루며 그를 대중에게 다시 소개했습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뮤지엄에 있습니다. 뮈세윔플레인 광장에 면해 있고, 트램 2·5·12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개관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연중 문을 엽니다. 온라인 사전 예약을 강력히 권합니다. 성수기에는 사실상 필수입니다.
같은 미술관에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세 점 더 있습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연애편지』, 그리고 『작은 거리』입니다. 마지막 작품은 페르메이르가 남긴 단 두 점의 야외 그림 중 하나로, 나머지 하나인 『델프트 풍경』은 헤이그에 있습니다. 두 도시를 함께 다니시면 그의 야외 작업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야경』도 같은 건물에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우유입니다. 삼백육십 년 동안 그 줄기는 그릇에 닿지 않았습니다. 페르메이르는 완료된 동작이 아니라 진행 중인 동작을 골랐고, 배경에서 물건을 하나씩 걷어내 그 동작만 남겼습니다.
이미지: The Milkmaid – Johannes Vermeer, 약 1660년, 레이크스뮤지엄 소장.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