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1500)
이 그림에서 뒤러는 자기 머리카락 색을 바꿨습니다. 다른 자화상들이 보여주듯 그의 머리는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이었지만, 여기서는 갈색입니다. 코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묘에 남은 그의 코는 조금 비뚤었는데 이 화면에서는 반듯합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도상으로 그려 넣기로 한 화가는, 그 전에 먼저 자기 얼굴을 정돈했습니다.
기본 정보
- 작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 제작 연도: 1500년 초 (29세 생일 직전)
- 기법: 린덴(보리수) 나무 패널에 유채
- 크기: 67.1 × 48.9 cm
- 미술 사조: 북방 르네상스
- 소장처: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이유
이 그림이 도발적인 이유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위험해서입니다. 정면을 향한 자세, 좌우 대칭, 가슴 앞으로 올린 손, 어둡고 흙빛에 가까운 색조. 이것은 15세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미지에서 익히 보던 조합입니다. 당대의 눈으로 이 그림은 놀라운 오만으로 읽히거나, 더 나아가 신성모독으로 읽힐 수도 있었습니다.
변호할 논리는 있었습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따라서 인간이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은 신의 창조를 닮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뒤러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도상으로 그린 것은 자기를 신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행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가리킨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다만 그 선을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밟았는지는 그림 자체가 말해 줍니다.
배경이 전혀 없다는 점도 여기에 기여합니다. 방도, 창문도, 사물도 없습니다. 검은 바탕뿐입니다. 시간도 장소도 지워진 곳에 얼굴만 남습니다. 초상화가 아니라 도상이 되는 조건입니다.
이 그림은 뒤러가 남긴 세 점의 회화 자화상 가운데 마지막입니다. 1493년 작품은 파리 루브르에, 1498년 작품은 마드리드 프라도에 있습니다. 열세 살에 은필로 그린 자화상 소묘도 전하지만 그것은 회화가 아닙니다. 앞선 두 점이 당시 관례대로 비스듬한 각도를 취한 데 반해, 이 마지막 작품만 정면을 봅니다. ‘나는 이렇게 생겼다’에서 ‘나는 이런 존재다’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역사적 배경
1500년이라는 숫자에는 무게가 있었습니다. 유럽 곳곳에서 종말에 대한 예감이 돌았고, 뒤러 본인도 2년 전 『묵시록』 목판화 연작으로 그 분위기에 응답한 참이었습니다. 이 자화상은 개인의 나이와 세기의 전환이 겹치는 시점에 놓인 그림입니다.
동시에 그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쇄술 덕분에 판화는 알프스를 넘어 유통되었고, 뒤러의 모노그램은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화가가 장인이 아니라 학식 있는 인물로 대접받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가 뉘른베르크로 가져온 것은 원근법과 비례론만이 아니라, 화가라는 직업이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감각이기도 했습니다.
화면에 새겨진 라틴어 문장은 그 감각의 결과입니다. 대략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인 나는 스물여덟 살에 이러한 색으로 나 자신을 그렸다’는 내용입니다. 이름과 출신 도시와 나이를 그림 안에 직접 새기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상징과 감상 포인트
먼저 눈을 마주치게 됩니다. 시선은 정확히 정면을 향합니다. 당시 초상화의 표준은 사분의 삼 측면이었고, 정면 응시는 성화에서 그리스도에게 배정된 자세였습니다. 뒤러는 그것을 자기 얼굴에 가져왔습니다.
다음은 손입니다. 오른손이 모피 깃 언저리에 올라와 있는데, 그 위치와 손가락의 굽은 모양이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연상시킵니다. 다만 이 손은 축복 자세를 정확히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옷깃을 만지는 동작과 축복의 몸짓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고, 그 모호함이 이 그림을 고발당하지 않게 만든 장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양옆의 어두운 공간에는 글자가 떠 있습니다. 한쪽에는 모노그램 AD와 연도가, 다른 쪽에는 네 줄의 라틴어가 눈높이에 놓여 있습니다. 배경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 글자들은 벽에 적힌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라틴어의 한 단어는 오늘날까지 번역이 갈립니다. ‘propriis coloribus’는 ‘나 자신의 색으로’, ‘알맞은 색으로’로도, ‘영원한 색으로’로도 옮겨집니다. 알테 피나코테크의 작품 설명은 앞쪽 뜻을 택합니다. 뒤러가 어느 쪽을 의도했는지, 혹은 두 가지를 겹쳐 읽히도록 골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올 한 올이 개별적으로 그려져 빛을 받는 부분에서 금빛으로 물결칩니다. 이 정도의 묘사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 머리 색을 실제와 다르게 칠했다는 사실은, 이 그림이 기록이 아니라 구성물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에 대하여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세 살에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 소묘가 지금도 전합니다.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남쪽의 이론과 자신감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북유럽의 치밀한 관찰 전통과 결합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회화보다 판화에서 더 멀리 갔습니다. 복제 가능한 매체였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목판화 연작과 『멜랑콜리아 I』은 지금도 서양 판화의 기준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처럼 준비 단계의 소묘조차 완성작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수학과 인체 비례에 관한 이론서를 직접 집필하며, 화가가 글을 쓰는 사람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산과 영향
이 그림 이후 자화상은 다른 장르가 되었습니다. 화가가 자기 얼굴을 그리는 일은 기록이 아니라 주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가 평생에 걸쳐 자기 얼굴을 그린 것도, 반 고흐가 자기 얼굴로 상태를 기록한 것도, 프리다 칼로가 자화상을 유일한 언어로 삼은 것도 같은 계보 위에 있습니다.
독일 안에서 이 그림은 미술사를 넘어선 위치를 갖습니다. 뒤러의 얼굴은 독일 르네상스 그 자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이 자화상은 알테 피나코테크가 가장 먼저 내세우는 작품입니다.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원본은 독일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상설 전시실에 있습니다. 미술관은 마이스포어슈타트 지구의 ‘쿤스트아레알(Kunstareal)’이라 불리는 미술관 밀집 구역에 있습니다.
가는 방법은 지하철 U2 쾨니히스플라츠(Königsplatz) 역, 또는 트램 27번 피나코테켄(Pinakotheken) 정류장입니다. 입장료는 상설 전시 기준 9유로, 할인 6유로이며, 일요일에는 1유로입니다. 다만 일요일은 그만큼 붐빕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2019년부터 대규모 보수 공사로 휴관 중이며, 재개관은 2029년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전 안내에 나오는 ‘세 곳을 하루에’ 일정은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19세기 대표작 일부는 알테 피나코테크 1층(동관)과 샤크 컬렉션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반 고흐와 모네를 함께 보고 싶다면 이 두 곳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는 정상 운영합니다.
알테 피나코테크 안에서는 레오나르도의 『카네이션의 성모』, 세계 최대 규모의 루벤스 컬렉션,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뒤러가 무엇과 겨루고 있었는지 감을 잡기에 좋은 조합입니다.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남는 것은 대담함이 아니라 계산입니다. 정면 구도도, 손의 위치도, 허공에 뜬 글자도, 심지어 머리 색까지 전부 선택된 것입니다. 스물여덟 살의 화가가 자기 얼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만든 화면입니다.
이미지: Self-Portrait – Albrecht Dürer (1500). 라이선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